* 이 글은 다음 사이트(http://ppss.kr/archives/1660)에 실린 글의 원문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므로 블로그에 올린다.
기득권층
- 완벽한 태극의 조화 -
나는 누구인가? 빈털터리, 무능력, 가족으로부터 소외, 주변의 따가운 눈총 등을 대표하는 ‘개털 인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발버둥 쳐, 이제 겨우 중산층에 들어섰다고 자기 위안을 삼는 사람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벌어 부유층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처박혀 외제 고급차 가격과 맞먹는 값비싼 오디오나 굴리면서 매일 음악과 영화를 보며 죽을 때는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면, 나도 기득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부유층이 곧 기득권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물음에 대해 긍정할 수 없다. 내가 죽을 때까지 놀고 살 수 있는 돈을 모으는 순간, 나는 세상과 등질 것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의 그림과 현실은 너무나 다르고, 또 지금 현실을 그 그림에 가깝도록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부유층이 된다면,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소비’밖에 없다. 이런 ‘미래의 나’를 ‘기득권층의 인물’로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설령 돈을 많이 벌어도 나를 가지고 기득권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개소리를 하는 개’라고 할 수 있다.
‘기득권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 기득권층을 제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령 기득권층이 소위 ‘양심’을 가진 자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제어해야 할 대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내아무리 이 땅에 기여할 것이 없어 세상을 버렸다지만, 선거철이 되니 이러한 물음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구나. 그래서 연암 박지원 선생을 찾아가 답을 구하고자 한다.
1.
양 눈 중심부에 힘을 준다. ‘저 놈은 뭐야.’ 어느덧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유체 이탈에 성공했으니, 마음대로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한양 저작거리를 지나가는 망나니 부자의 몸을 잠시 빌려, 박지원을 찾아 갔다. 그의 단편 소설 <양반전>은 지금 초등학생도 다 읽는다고 하니, 그도 사람인지라 애처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나갈 것이 두려워, 입시나 특목고 입학을 위해 아이들이 <양반전>을 읽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나도 아주 가끔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비록 몸은 빌렸으나, 부자라는 게 참 좋군요. 비싼 청나라 말을 타고 다니니,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또 계집질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 . 그래서 가난한 선생에게 양반 증서를 사고 싶소. 부자에 양반만 되면, 거칠 것이 없소이다.”
“너 같은 놈에게는 안 팔아. 양반의 권력은 대단하지. 마음대로 이리하라 저리하라 백성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또 자식에게 대물림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것은 기득권이지. 양반은 기득권층이야. 내가 양반 신분을 판다고 당장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며, 또 신분제 없애자고 해도 나를 따를 사람도 없지. 일단은 양반답지 못한 놈들이 양반 행세를 하니 큰 문제야. 너 같은 놈에게 양반 증서를 넘기면, 양반답지 못한 양반만 한 명 더 늘어나는 꼴이지. 난세(亂世)야, 난세 .. .”
선생의 말을 곱씹어 보니, 과거 기득권층의 두목은 당연히 왕이었다. 왕은 타고나면서 그 누구도 침해하기 힘든 권력을 물려받았으며,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백성을 억압하거나 제어할 수 있다. 그래서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이 강조되는 것이다. 덕을 갖춘 왕은 백성의 삶을 편안하도록 하려 하기 때문에 주변의 정세도 자세히 살펴 변화하는 상황에 적합하도록 사회를 변통시키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양반도 양반답게 행위한다면 백성에게 이로운 존재다. 이것이 선생의 말에 담긴 뜻이라면, 기득권층에 속한다는 것이 반드시 악의 소굴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계급 사회에서 ‘기득권층’은 ‘지배층’을 뜻하며, 그것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배층의 역할에 의존적이다. 기득권층이 무조건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점은 지금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회’, 즉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사회’에 적용 가능한 기득권층의 규정 방식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선생에게 대기업 S 그룹을 다룬 신문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여 주었다.
• 댓글들 내용 알아서 생각해 보기
“이 놈들 썩어빠진 양반들과 같은 놈들일 세, 돈과 권력도 자식에게 물려주고 ... .”
“왜요? 정치 세력도 아닌데, ... .”
선생의 말은 이러했다. 왕과 양반 계층이 사라진 사회에서 기득권층이란 ‘과거 썩어빠진 양반들 행세를 하는 놈들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곰곰이 따져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소수 기득권층이란 자신들의 관심사에 따라 사회 상태가 유지되도록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 기득권층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경우는 자신들의 관심사가 오로지 자신들의 세력 유지 및 확장과 관련된 경우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층에 속하는 방법 중 하나는 기존 거대 정당의 실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사회 상태가 유지되도록 사람들을 제어하려는 목적이 정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러한 목적 아래 여러 집단이 결탁해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해 나가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정경유착(政經癒着)이 이를 대표한다. 정경유착이 고착화되면, 부유층에 속한 자들이 기득권층에 속하게 되기 쉽다는 것은 당연하다.
2.
선거 때만 되면, 정당 후보들은 ‘국민의 심판’ 혹은 ‘국민의 종’을 입에 달고 다닌다. 또 모든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떠든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기득권층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곤 한다. 단지 시민의 의견을 대리하는 직업 종사자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말인가? 입법을 하는 것도 그들이고, 또 특정 정당의 후보가 정부의 수장이 되어 권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합법적 갱(gang)’이다. 차라리 존경받는 기득권층으로 남고, 또 적절한 시기에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말하는 자가 양심적인 정치가이다.
정당 민주제는 권력의 평등한 분배 상태를 지향하지만, 그러한 상태는 단지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이상’에 불과하다. 정치권은 경우에 따라서는 소수를 위해 혹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이때 정치 세력은 부정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층에 불과하지만, 법치(法治)라는 방패막이를 사용해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정치가가 ‘국민의 종’으로 자처하려면, 그의 관심사는 다수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다수를 위해 실천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착한왕’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다가오듯이, ‘착한 정치가’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동기와 무관하게 정당의 세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은 다수의 관심사와는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인해, 혹은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 인해, 정치가의 선의는 악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정치가의 양심과 무관하게, 정치 세력은 항상 부정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층이 될 수 있는 집단이다. 이 때문에,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 가려면 한 세력이 계속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나둘 수 없다. 이를 위해 고안된 투표 제도는 민주주의의 상징과 같다.
일정 이상의 나이가 되면, 누구나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며, 그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바보이든 천재이든,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기득권층에 아첨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저항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또 다수가 자신의 관심사를 잘 파악해 자신과 맞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투표를 통해 정치권을 심판한 결과는 다양하다 못해, 심지어 혼란스런 모습을 띠곤 한다. 투표가 정당 민주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갖는지는 항상 논쟁거리가 된다. 분명한 것은 정치권을 포함한 기득권층에 대한 시민 세력의 제어 없이 민주주의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대통령이 국회 해산권마저 갖고 있던 독재 시절이 지나고, 누구나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있도록 절차적으로 민주화되었다. 독재 권력의 잔존 세력도 나름대로 노력을 다하여 살아남아 ‘파란색 깃발’을 흔들며 지지자들을 끌어 들였다. 반대 세력도 ‘빨간색 깃발’을 흔들며 상당한 세를 과시하게 되었다. ‘빨간색 깃발’은 ‘균형 발전’, ‘사회적 분배’,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는 외교 정책’ 등을, 그리고 ‘파란색 깃발’은 ‘신도시 개발을 통한 지역 발전’, ‘경제 성장을 통한 재분배’, ‘미국과의 탄탄한 공조를 바탕으로 한 외교 정책’ 등을 상징했다. 기득권층에 들어가려고 할 때 어느 깃발 아래 서야 할 것인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정당들은 깃발만 흔들었지 깃발을 제대로 꼽지 못했다. 깃발의 색과 무관하게 모든 정당의 행위를 ‘구태’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 국내외 정세 변화 및 연이은 경제 위기로 인해, 기존 정당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정당들은 고민에 빠졌다. 정당을 낚시꾼에 비유할 때, 기존 정치적 이념들은 시민의 한 표라는 고기를 유혹하는 ‘떡밥’으로는 너무나 부족했다. 게다가 그들의 정책마저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현 상황을 박지원에게 알려주기 위해 한 장의 지도를 펼쳤다. 물론 그 지도는 현실을 상당히 과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무관심 계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 갑은 야당이고, 을은 야당이요. 곧 있으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소. 현재 여당인 을의 후보와 갑의 후보는 백중세요. 다수는 정치적 무관심 계층이요. 그렇다고 그들이 정치에 아예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오. 다만 기존 정당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들일 뿐이라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상당수는 언제 잘릴지 몰라 걱정하는 비정규직 종사들이오. 또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가 많이 나지 않는 바람에 취업을 걱정하는 젊은 층이라고 해요. 상당수는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야동’으로 대리 만족을 하고 있었으나,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상한 법 때문에 그것마저도 쉬쉬하면서 해야 하는 상황이오. 또 상당수는 ... .”
“야동이라니?”
갖고 온 스마트폰으로 야동 한 편을 보여주니, 선생은 놓고 가란다. 어쨌거나 영민한 선생은 갑과 을의 정책은 실질적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정당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적 무관심 계층 사람들의 표가 필요하다. 결국 갑과 을 모두 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깃발을 흔들어야 한다. 양쪽 깃발에는 ‘경제 민주화’, ‘복지’ 등 동일한 문구가 들어가 있다.
“선생, 그렇다면 갑과 을은 아무런 차이도 없단 말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아. 작은 차이도 구체화되면 크게 보이는 법이지. 작은 차이가 그렇게 큰 차이로 보이려면 정책이 구체적이고 전문성을 띠어야 하는데, 깃발만 흔들고 꽂아 본 적이 없는 세력들이야.”
기존 정당들이 정책을 장기 중기 단기로 나누고 장기 계획과 중기 계획을 매개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단기 정책을 짤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되었을 것이다. 지금 경제 수준이면 사실 교육 정책만 제대로 되어도 사람들이 먹고 살만 하다. 교육비 지출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하는 상황에 적합한 학제라는 것은 양질의 콘텐츠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그러한 콘텐츠의 활용 방법을 정책적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으니, 당장 대학의 수를 줄이는 방법부터 고민해야 한다. 투자비 대 효용을 감안할 때 현재 대학 교육은 질적인 측면에서 떨어짐에도 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콘텐츠 개발과 구축에 관심을 갖는 정치권은 없다. 그저 입시 제도를 바꾸고 그에 따른 단순한 학제 개편을 교육 정책인 양 선전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는 입시 제도는 단순화시켜 때가 될 때까지 그대로 나두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처사일 수 있다. ‘경제 민주화’는 일상적 표현이 되었음에도, 그것을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후보는 없다. 그렇다 보니,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하청 업체로 전락해 버린 경제 체계를 변통시킬 수 있는 장기적 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후보도 없다. 과학 기술 정책 및 종교 정책으로 넘어가면, 아예 평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간 미래 세대에 대해 많은 정보를 흡수한 선생은 말했다.
“정당들만 가지고 평가하면, 네가 온 미래 상황은 총체적 부실 상태야.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과 비슷해”
굳이 독일의 소수 정당인 ‘좌파당’과 같은 곳의 사례를 들먹일 필요가 없다. 하다못해 ‘해적당’만 하더라도 공식 홈페이지에 가보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영역별로 잘 갖추어진 정책 책자가 있다. 해적당 정책 책자와 비교해도, 지금 이 땅의 거대 정당의 정책 책자는 너무나 얇다. 거의 동네에 도는 홍보 전단지 수준이라, 거기에서 어떤 비전도 엿볼 수 없고, 또 전문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영민한 선생은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과 을은 ‘진실 밝히기 게임’을 할 수밖에 없어. 독재 정권의 후예인 을이 언제 복지와 경제 민주화에 관심을 가졌었냐고, 갑의 후보는 말하지. 지금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다 갑이 정권을 잡았던 기간에 그 원인이 마련된 것이라고, 을의 후보는 말하지. 그러면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남북 대처 상황을 걸고 넘어가지. 그래, 너는 누구 편이나?”
“누구 편이라뇨? 다만 과거 행적을 고려할 때, 을의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은 바라지 않소.”
“갑의 후보가 되면 너희들을 세뇌시킨 민주주의의 이상, 즉 권력의 평등한 분배 상태에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일까?”
선생의 질문에 차마 뭐라고 딱 부러지게 답할 수 없었다. 정치에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관계라는 것도 없고, 그 불확실성은 그 무엇보다 크기 때문이다. 확신을 갖고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확신을 갖고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에 맞서는 유일한 길이지.”
4.
연암 박지원에게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기존의 정당 기반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정치권이라는 기득권층에 들어갈 수 있을까? 자신은 정치권에 들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청치권을 제어할 수 있는 시민 세력으로 남겠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 답하기를 강요하자, 선생은 기득권층의 실세가 되는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눴다. 그 하나는 장기적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단기적 전략이다.
“나라면 장기적 전략을 택하겠네. 정말 전문성을 갖춘 정책을 낼 수 있는 정당으로 진화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이야.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금이나 인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된 경우에 하는 말이야. 그리고 밑바닥 운동부터 올라가는 거지. 그리고 거대 정당이 되면 원래 출발 당시의 정신은 조금 퇴색할지라도, 정확한 상황 진단에 근거한 정책 정당으로는 거듭날 거야.”
“그렇다면 기껏해야 아주 한참 후에야 기득권층에 들어가는 거 내. 또 기껏해야 기존 정당에 비해 ‘부정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층’으로 낚인 찍히지 않을 뿐, 반드시 좋은 평가만 받을 것 같지도 않소.”
“그렇지. 하지만 그런 정당이 생기기 어려운 상황이야. 또한 생겨도 대중으로부터 주목받기 힘든 상황이야. 내가 아까 야동만 본 게 아니야. 진보와 보수를 가장한 신문사 기사들을 보렴. 교육만 해도 그래, 전부 입시와 연계해 뒤로 한 몫 챙기면서 진보와 보수를 논하지. 신문사들도 그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기득권층이야. 신문 기사들을 보고, 다 알게 되었어. 내가 쓴 것들을 미래 아이들이 읽는 이유 말이야.”
선생의 말을 듣고 가슴 한 편에 냉기가 올라왔다. 선생에게 정치권이라는 기득권층에 들어갈 수 있는 단기적 전락을 알려 달라고 재촉했다. 선생의 말은 이러했다.
• A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IT 업계에서는 기득권층에 속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책은 많이 썼으나 전문성을 갖춘 정책을 짤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A는 갑과 을 두 정당을 비교해 본다. 을의 조직은 후보를 중심으로 너무나 꽉 짜져 있어 들어갈 틈이 없다. 반면에 이제 막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규합하기 시작한 갑의 후보 진영은 느슨한 측면이 있다. 또 정치적 무관심 계층의 다수가 을 후보를 믿지 않는다. A는 갑 정당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갑과 을을 막론하고 사방으로부터 지원군을 모아 ‘융합과 통합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를 강조했다. A는 을 후보의 지지세를 약화시키는 데 동조하는 대신, ‘갑에게 기득권을 내려놓는 새로운 정치’를 위해 자체 혁신을 요구했다. 을의 기존 수장 MB보다도 갑 후보의 계파를 더욱 심하게 몰아 붙였다. 그리고 갑으로부터 선거 후 ‘새로운 헤쳐 모여 방식의 통합 정당 및 정부 구성’이라는 약속을 얻어 냈다. 갑 후보가 당선되든 말든, 갑 정당의 일정 지분은 A의 몫이 될 수 있다. 심지어 그 지분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여 그 정당의 실세가 될 수 있다.
정당 민주제에서 어차피 제도적으로 기득권일 수밖에 없는 것이 거대 정당 세력이다. 그런데 A가 말하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새로운 정치’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직 정치를 몰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고도의 술수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나로서는 선생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A의 동기는 순수한 것이오? 아니면 자신의 야욕을 화려한 미사여구 속에 감추는 재주를 가진 전략적인 사람이오?
“쓸 데 없는 질문이다. 앞으로의 과정과 결과만 중요할 뿐이지.”
A와 동조해 갑 후보가 대선에 승리해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 앞으로 더 좋은 결과가 나올까?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더 나쁜 결과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선생의 의견이었다. A가 정치적 실세 중 한 명이 되고, 대통령제와 내각 책임제를 결합한 정부 형태가 탄생할 수도 있다. 그러한 정부 형태 자체가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그런 정부 형태를 바라는 자들이 갑과 을 세력 양쪽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약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해 하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자’들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들이 A를 매개로 새로운 정부 형태에 흡수되는 경우, 두 정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눠 먹기 식의 정치판이 구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판이 구축된다면, 이것 또한 완벽한 태극의 조화가 아니겠는가? 서로 달라 보이는 두 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계속 유지하니 말이야. 사대주의에 물든 족속의 후예들이라, ‘정반합에 근거한 변증법’ 서양 누구의 이런 말에 혹한다지? 서로 다른 두 힘이 만나 발달해 영원히 지속 가능한 기득권층을 형성하니, 정말 신통하도다. 아마 선조들이 이걸 미리 예측해서 국기에 태극 도식을 집어넣었을지도 몰라.”
선생의 농담에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최선의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 증후군은 무엇이오? 만약 태극의 조화로 상징된 최악의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 증후군은 무엇이오?”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네. 그러나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답할 수 있지. 만약 A와 동조해 갑 후보가 정권을 차지했는데, 전 정권의 실정을 심판하지 못하고, 또 법적으로 잘못한 것에 대해서 엄하게 처벌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태극의 조화가 나타날 기미로 보아야 해. 만약 그런 기미가 나타난다면 갑 후보는 결단을 내려야지. 그렇지 않다면 을 후보가 된 경우보다 못할 수도 있어. 을 후보가 되는 경우, 갑 쪽은 새로 세를 규합할 기회라도 생기는 것이니까.”
5.
내 아무리 이 땅에 기여할 것이 없어 세상을 버린 자라고 하지만, 박지원이 말한 ‘완벽한 태극의 조화’가 이 땅에 정착하는 것은 싫다. 고급 외제차 가격에 맞먹는 오디오를 굴리는 꿈을 접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졌다. 비록 일순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선생, 완벽한 태극의 조화가 정착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소?”
“기득권층인 거대 정당 세력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또 모든 국민이 ‘깨인 자’가 되기를 기대하지도 말라. 더 이상 신분으로 타고난 왕이 없고,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가졌으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기득권층을 제어할 수 있는 상당수의 ‘사회적 촉진자’들이 있어야지. 그리고 그들의 입장을 세상에 드러내 줄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해.”
“도대체 선생이 말하는 ‘사회적 촉진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그러한 자들이 갖추어야 할 역량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다수에게 답이 명백한 문제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혹은 이래라 저래라 거창하게 말하고, 또 만만한 상대를 골라 까대는 ‘꼰대’들은 아니야. 여기서 더 말하면 내가 자칫하면 꼰대 짓을 하게 되니까, 스스로 답을 찾아. 네가 빌린 부자의 몸도 지쳤으니, 이제 그만 그를 놓아 주거라. 부자 몸에게는 너도 기득권이었어. 네 몸도 위험할 수 있으니 이제 돌아가거라.”
선생은 사실 나를 보는 순간, 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뭐 당연한 것 아닌가! 원래 몸으로 귀환하는 동안만큼은 선생의 마지막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 이 글을 쓰는 데 참조한 자료
블로그 ‘과학과 철학’의 글들
• 민주주의 http://blog.daum.net/goodking/494
• 투표의 역설 2: 공간 이론 http://blog.daum.net/goodking/42
박지원의 <양반전>과 <허생전>
Mill, J.S.(1859), On Liberty (다수를 제어함으로써 다수에 의한 독재 가능성을 다룬 부분 참조).
Michels, R.(1911), Political Parties (민주제 정부가 과두 정부 형태를 띠게 되는 가능성을 다룬 부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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