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 공동체주의(Syndicalism)
-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 -
1.
민주주의 정치 이론을 이해할 때,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 민주주의와 대립 관계를 맺었던 정치 이론은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근간을 둔 사회를 논할 때 불필요하거나 사소하다.
위 생각이 착각에 불과한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 이론을 포함한 모든 정치 이론은 그 실현 과정에서 한계를 가지며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화한다’는 사실만 인식해도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부분의 정치 이론은 ‘정치를 통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의 산물이다. 그러한 신념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까지 서양 문명을 지배한 일종의 ‘시대정신(Zeitgeist)’과 같다. 그러한 시대정신 아래 다양한 정치적 실험들이 진행되었고, 각 정치 이론은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다른 이론의 개념을 차용해 수정을 거듭해 왔다. 민주주의 이론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현대 민주주의 이론은 각 나라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다른 정치 이론의 중요 개념들도 수용하면서 진화해 왔고, 또 여전히 진화 중에 있다. 심지어 민주주의와는 대립 관계를 맺은 정치 이론의 개념들이 현대 민주주의 이론 속에 스며들기도 했다. 실례로 소외 개념이 현대 민주주의를 논할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 정착하는 데에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계열의 이론가들의 기여가 있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강한 흔적을 남겼으면서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생소한 정치 이론 하나를 나보고 예시하라면 ‘조합 공동체주의(syndicalism)’를 들겠다. 노동조합에 의한 태업, 파압, 데모 등은 신문 방송을 장식하는 일상사가 되었지만,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런 것도 사회에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잡는 데에는 조합 공동체주의의 기여가 있었다.
2.
조합 공동체주의로 번역한 ‘syndicalism’은 ‘노동조합(trade union)’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 ‘syndicat’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용어의 유래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합 공동체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스페인 및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노동자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자들이 착취에서 벗어나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계층을 계급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상태를 붕괴시켜야 한다. 그러한 사회 상태에서 계층들은 서로 수평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상부와 하부의 위계질서를 갖는 계급 구조를 보인다. 즉, 그러한 사회 상태의 계층들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거래 관계를 맺는 가운데 그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부와 하부의 고정된 위계질서를 갖는 계급 구조로 귀결된다. 계층을 계급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상태에서 생산과 노동이 자본에 종속되는 경우, 노동자 계층은 하부 계급으로 전락한다. 노동자 계층이 하부 계급에서 벗어나려면 자본과 노동 혹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갈등 관계를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그러한 갈등 관계는 노동자 계층을 자본에 종속시킨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자본가 계급이 저야 한다. 하지만 사회의 상부를 차지하는 자본가들이 주도해 노동자 계층을 자본에 종속시킨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노동자들 스스로 자본과 노동의 계급 갈등을 자각하고 그러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구조를 붕괴시키거나 약화시키려고 실천해야 한다. 태업, 데모, 총파업 등은 그러한 실천 수단을 대표한다.
조합 공동체주의에 대한 위의 정리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합 공동체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정치 이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의 혁명에 의해서만이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계급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경우, 조합 공동체주의는 ‘혁명적 조합 공동체주의(revolutionary syndicalism)’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조합 공동체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나 아종(亞種)처럼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조합 공동체주의는 국가 권력 기관으로서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 체제 하의 단일 정치 세력인 공산당에 의한 정부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 기관으로서의 정부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 외부 세력에 저항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 국가의 존속은 그 어떤 공동체의 존속보다 우선하며, 국가 권력을 대리할 정부가 필요하다. 정치가 계층은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잠재적 후보들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를 인정하는 것은 정치가 계층을 인정하는 것이고, 정치가 계층을 인정하는 것은 직업군으로서의 별도의 정치가 집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체제는 간접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당 민주제 혹은 대의 민주제이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어울리기 힘들지라도, 그 둘은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 없이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관점을 전제한 이론들이다. 현대 민주주의를 투표를 통해 정당 간 경쟁을 인정하는 정치 이론으로 규정하는 경우, 공산주의는 공산 체제에 근거해 사회를 조율하는 단일 정당만을 인정하는 정치 이론이다. 반면에 아나키즘(anarchism)은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 이론이다. 조합 공동체주의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정치 이론은 아나키즘이다.
조합 공동체주의에 따르면,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의 계급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을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 계층의 현실 인식이다. 이 점에서 조합 공동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일치한다. 하지만 조합 공동체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아나키즘에 가깝다. 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음 물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답변을 살펴보자.
•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 설계를 담당하고 계층 간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갖는 정치 영역은 필요하다. 이로부터 정치 영역의 기능을 전담할 별도의 정치가 계층이 필요할까?
외부의 적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위 물음에 대해 긍정한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믿도록 길들여졌다. 국가 권력 없이는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믿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은 제도권 교육의 목적 중 하나다. 아나키즘은 위 물음에 대해 반드시 긍정적으로 답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에 근거한 정치 이론이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정치라는 영역은 필요하지만,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별도의 정치가 계층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를 받아들이면, 국가라는 것은 단지 ‘정치가 계층의 필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공된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사회의 실재성에 국가라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국가 권력을 대리할 정부라는 것도 필요 없다. 국가 권력을 대리할 정부를 인정하고 정부를 구성할 별도의 정치가 계층을 인정하는 한, 정치가 계층은 다른 계층과 수평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계층의 상부에 위치하는 권력 계급이 될 수밖에 없다. 아나키즘에 따르면, 이 점은 투표가 정치 집단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국가 권력을 대리할 정부 및 정부를 구성할 정치가 계층을 인정하는 한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는 자체 모순적인 정치 이론이다. 물론 이러한 아나키스트의 입장에 대한 반론은 만만치 않다. 그러한 반론 대부분은 국가 권력 없이는 사회는 무질서 상태에 빠지고, 결국 외부의 적에 의해 붕괴될 것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아나키즘 옹호자들의 반응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국가 권력이 전제될 논리적 이유는 없다.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이 성립하지 않는 소규모 공동체들로 구성된 사회의 경우, 그러한 공동체들의 자발적 합의에 근거한 의사 결정만으로도 사회는 효과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한 의사 결정을 위한 기구나 협의체를 구성할 때 별도의 정치가 계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회 설계를 위한 정책을 짜는 것이 정치라면, 정치에서 요구되는 것은 정치 세력의 의사가 아니라 공동체들의 의사를 수용하고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다.
소규모 공동체들의 자발적 합의에 근거한 기구나 협의체를 구성하는 방식은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서는 논외로 하자.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anarchism’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정부 개념을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권력 기구로 한정짓는 경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다. 정부 개념을 공동체의 협의 기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는 경우, ‘아나키즘’을 ‘반국가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전자보다는 후자의 번역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전자의 번역 방식은 국가의 부정이 반사회적인 것과 동일하다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국가를 부정한다고 해서 반사회적 정치 이론은 아니다.
소규모 공동체들을 바탕으로 한 아나키즘은 조합 공동체주의와 대동소이한 정치 이론이다. 조합 공동체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를, 그리고 ‘정치라는 영역이 단지 사회의 공론장으로만 기능하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조합 공동체주의는 아나키즘 이론과 함께 형성되고 실천된 정치 이론이다. 조합 공동체주의에 배어 있는 아나키즘의 요소를 강조하는 경우, ‘조합 공동체주의’는 ‘반국가적 조합 공동체주의(anarcho syndicalism)’로 불리기도 한다.
3.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원으로 간주되는 ‘직접 민주주의’도 조합 공동체주의처럼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정치 이론이다. 직접 민주주의에서 정책 결정 과정은 별도의 정치가들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선적으로 선출된 시민들로 구성된 정책 협의 기구는 최근 기술의 발달 덕에 실현 가능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그러한 여론의 배후에는 기존 정당 정치 세력에 대한 불신이 한 몫을 한다. 직접 민주주의가 현대 기술을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 이론일 수 있다면, 조합 공동체주의 역시 하나의 대안 이론으로 여겨져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조합 공동체주의의 탄생 배경에는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점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부분의 정치 이론은 ‘정치를 통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의 산물이다.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 까지 그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각종 정치적 실험은 18세기 중엽 이후에 가시화된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의 연장선에 서 있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에 따르면,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키면 이에 따라 복지가 수반된다.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개인 간 거래를 촉진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의 시장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에 따르면, 출신 및 능력에서 차이를 보이는 개인들의 거래만 확장하면 오히려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사회의 극심한 불균형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복지는 결코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킨다고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두 입장을 양 극으로 놓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각종 정치 이론들을 평가해 볼 수 있다. 전통적 자유주의, 전통적 자유주의 정신을 계승한 미국의 신자유주의, 자유 민주주의 등은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에 가깝다. 반면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은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에 가깝다. 사회 민주주의, 질서 자유주의, 복지 지향 자유주의 등은 그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의 한계를 지적하되 비관적 입장에 빠지지 않으려는 시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본격화된 각종 정치적 실험의 결과로 탄생한 대부분의 이론들은 ‘정치가 계층에 의한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전제하고 있다.
조합 공동체주의가 가장 많은 지지층을 확보한 시기는 연구자마다 약간의 의견 차이를 보이기는 해도 일반적으로 1905년에서 1919년 사이로 거론된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조합 공동체주의에 매료된 동기 중 하나는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을 표방한 정치 세력이나 정당들은 하나같이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고 강조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실질적 이득은 거의 없었다. 급기야 노동자 계층의 자율권을 획득하기 위해 사회당을 비롯한 기존 정당과 결별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타났다. 정당 정치와의 독립을 선언하고 조합 공동체주의 노선에 따른 최초의 노동조합 CGT(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l)가 프랑스에서 결성되었다. CGT의 형성과 확장에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아나키스트들로 프루동(P. Proudhon)과 바쿠닌(M. Bakunin)을 들 수 있다. 프루동은 사유 재산과 국가에 반하는 정치 이론을 펼쳤으며. 바쿠닌은 정당, 특히 공산당의 역할과 관련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판대에 올렸다.
그러나 조합 공동체주의를 옹호한 모든 노동자들이 ‘정치란 다양한 사회 영역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공론장일 뿐 별도의 정치가 집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아나키즘의 정신을 충분히 숙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시급한 것은 자본에 종속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었다. 따라서 조합 공동체주의를 옹호한 노동자들과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한 것은 전략적 측면에서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연대는 볼셰비키 혁명 발생까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졌다. 그들의 연대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당 독재 체제가 굳어지면서 금이 가버린다. 그리고 제 2차 대전을 거쳐 미소 냉전 시대가 굳어지면서, 조합 공동체주의는 역사의 화석과 같은 존재로 남게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을 거쳐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대결 구도가 세계를 지배한 과정은 사람들이 국가라는 개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 과정이기도 하다.
조합 공동체주의는 20세기 초 전 세계에 걸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 그들은 조합 공동체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기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합 공동체주의가 사회 운동 차원에서 가시화된 곳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칠레 등의 나라였다. 물론 조합 공동체주의의 범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이들 나라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국의 톰 맨(T. Mann), 미국의 윌리엄 헤이우드(W. D. Haywood), 윌리엄 포스터(W. Z. Foster) 등은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조합 공동체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및 몇몇 라틴 아메리카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조합 공동체주의는 사회 운동 차원으로 가시화되지 않았다.
조합 공동체주의가 노동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정당과 연대하여 노동조합 운동이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합 공동체주의는 노동조합 운동이 정당과 연대해 제도권 영역으로 이미 흡수된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곳에서는 큰 지지 세력을 얻을 수 없었다. 실례로 당시 독일의 최대 노동조합 DGB(Deutche Gewerkschaften Bund)는 사회 민주당 SPD와 연대하고 있었다. 조합 공동체주의 정신이 현재에도 남아 있는 곳을 들라면, 스페인을 손꼽을 수 있다. 적어도 경제 영역에서는 조합 공동체에 기반을 둔 기업들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 세계 차원에서 경제 위기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조합 공동체 형태의 기업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4.
투표를 통해 특정 정당 정치인들이 정부를 구성하는 방식만으로는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현대 정당 민주제는 단지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가기 위한 단계일 뿐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반면에 현대적 정당 민주제는 정치가 계층과 다른 계층의 상호 제한과 협력을 통해 다른 유사한 정치 체제보다 사회 유지에 더 효과적이라는 입장이 있다. 그 어떤 입장을 취하든, 현대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려는 사람은 오로지 ‘민주주의’라는 안경만 쓰고 현실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실은 현대 민주주의가 정착한 과정의 역사만으로는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 요인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 이론과 무관하게 발달하고 사회에 정착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 중에 착각이다.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들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결코 민주주의 역사만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한 인식이 현대 사회에 자리잡는 데에는 조합 공동체주의의 기여가 있었다.
* 덧글
서양 아나키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졸(James Joll, 1918~1994)의 다음 책을 권한다.
Joll, J.(1980), The Anarchists, 2nd ed. Harvard University.
위 책은 우리말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국내 출판문화에 비추어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국내 출판업자들과 편집인들이 진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현명함을 갖고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의 책에 대한 정보력 수준 및 안목이나 마케팅 전략을 보면, 국내 출판 업계 대다수는 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출판업자들은 최근 열악한 출판문화를 거론하며 지원책이 필요하다며 생떼를 부리고 있다. 출판문화가 그렇게 된 일차적 책임은 그들이 져야 한다.
아래 링크한 것은 전쟁을 소재로 학생들의 텍스트 분석력을 강화하기 위한 교재의 일부이다. 해당 부분은 제임스 졸의 책 <제 1차 대전의 기원(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I, 1984)> 마지막 부분을 잘라낸 것이다.
http://history.lsa.umich.edu/318/Readings/Joll.pdf
'과학과 철학 에세이 > 진보의 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의와 우정: 정의에 대한 두 접근법(Justice & Friendship: Two Approaches to Justice) (0) | 2013.11.01 |
---|---|
과학적 관리법, 시간과 동작 연구 (0) | 2013.09.21 |
엘리트 이론(Theory of Elites) (0) | 2013.04.04 |
기득권층: 완벽한 태극의 조화 (0) | 2013.03.22 |
무임승차(Free Rider) (0) | 201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