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과 실재 6. 영역과 계층의 관계를 통해 본 세속화 과정

착한왕 이상하 2013. 9. 16. 22:43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기 이전의 상황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 <대응 조건>

교육, 정치, 경제 등 사회 영역들 각각에 대응하는 별도의 계층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위계질서 조건>

사회 영역들은 고정된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는다.

 

위 두 조건을 만족하는 현실 공간 S를 분석해 보자.

 

• A, B, C, D 각 영역에 대응하는 특별한 계층 a, b, c, d가 있다. a에 속하는 사람이 A이외의 영역 B와 C에 안주하는 것은 S에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b, c와 d 계층에 속한 사람도 B, C와 D 이외의 영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다. A가 사회 영역들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면, A에 대응하는 계층 a의 사람들은 b, c와 d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는다. 물론 각 영역의 계층은 재산과 지출 및 지식과 정보 활용 정도 등의 차이에 의해 좀 더 작은 계층들로 분화된다. 그러한 분화 정도를 고려하면, 계층 a, b, c, d는 실제로는 {a1, a2, ..., ak}, {b1, b2, ..., bl}. {c1, c2, ..., cm}. {d1, d2, ..., dn}을 뜻한다. 여기서 ai, bj, ck, dl 등은 a, b, c, d의 특정 소계층을 뜻한다. a에 속한 임의의 소계층 ai는 b, c, d에 속한 소계층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누린다. 소계층들 ai, bi, ci, di가 소득 등을 기준으로 하나의 계층으로 묶을 수 있는 경우에도, 영역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그것들 사이에 성립한다. <대응 조건>과 <위계질서 조건>을 만족하는 현실 공간 S에서 a, b, c, d는 엄격한 신분제에 따른 출신 성분을 뜻한다.

 

위의 현실 공간 S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기 이전 이 땅의 사회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영역 A, B, C, D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을, 그리고 a, b, c, d에 양반, 평민, 상놈, 천민 계층을 대응시켜 보면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분명해 진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기 이전 이 땅의 현실 공간은 개인들이 신분의 장벽에 가로 막혀 사회 영역들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도 소극적 의미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음을 논했다. S의 경우, 생존 수단을 마련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원하는 것도 신분에 의해 결정된 사회 영역과 계층에 한정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개인이 정할 수 있는 삶의 방향도 그러한 영역에 국한해 의미를 갖게 된다.

 

정치 영역에 속하는 양반 계층은 ‘자신의 뜻에 따라 민중을 강제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행위하도록 재화 및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 기득권층’이다. 동시에 ‘그 신분이 계급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 기득권층’이다.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란 실질적 기득권층이 동시에 형식적 기득권층으로 보장받는 집단을 뜻한다. 세속화 과정의 실질적 양상 중 하나는 그러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층의 붕괴 과정이다. 그 붕괴 과정을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해석할 때, 그것은 계층이 더 이상 계급을 뜻할 수 없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의 특징으로 개인의 의견과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은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 붕괴 과정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그런 특징이 서양 철학의 개인주의와 같은 입장을 전제해야 실현 가능하는 것처럼 여기는 순간, 세속화 과정의 실제 양상은 왜곡된다. 이 점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온 사람에게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이후의 상황을 고려해 보자. 그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현실 공간 T는 <대응 조건>을 반드시 만족할 필요가 없으며 <위계질서 조건>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현실 공간이다. 여기서 <대응 조건>을 반드시 만족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 A, B, C, D를 현실 공간 T의 사회 영역들이라고 하자. T는 <대응 조건>을 반드시 만족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A, B, C, D에 각각 대응하는 별도의 계층들 a, b, c, d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역들 A, B, C, D는 사회 유지에 필요한 기능 단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각 기능에 적합한 직업군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계층 a, b, c, d가 A, B, C, D에 속하는 경우, a, b, c, d는 A, B, C, D를 대표하는 직업군들을 뜻한다.

 

T는 <대응 조건>을 반드시 만족할 필요가 없는 현실 공간이다. 그러한 T가 <위계질서 조건>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T에서 사회 영역들이 고정된 위계질서를 갖는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T의 각 영역 A, B, C, D에 대응하는 별도의 계층들이 없는 경우, A, B, C, D는 개인의 잠재력이나 적성에 맞는 곳을 뜻한다. A, B, C, D에 속한 계층들이 있는 경우, 계층들은 그저 영역들로 구성된 T의 효과적인 유지에 필요한 직업군들로 간주된다. 그러한 직업군으로서 각 계층은 A, B, C, D 사이에 위계질서가 없어 계급으로 인식될 수 없다.

 

<대응 조건>을 반드시 만족할 필요가 없고 <위계질서 조건>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 공간 T에서 특정 계층이 계급으로 인식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T는 고정된 위계질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사회의 각 영역은 개인이 자신의 잠재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을 뜻한다. 이러한 T의 상태는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적극적 의미에서 실현된 상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T에 속한 개인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사회관계를 대화상대로 삼아 자신의 적소를 찾아 가는 존재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T가 이상적으로 실현된 경우,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부정적 판단에 근거한 타협적 결정과 비타협적 결정은 배제된다. T가 이상적으로 실현된 경우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이상적으로 실현된 경우에 해당한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이상적으로 실현된 경우의 현실 공간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판단에 근거한 결정을 배제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해석되는 사회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대응 조건>과 <위계질서 조건>을 만족하는 현실 공간 S가 <대응 조건>을 반드시 만족하지 않을뿐더러 <위계질서 조건>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T로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받아들이면, 방법론의 측면에서 신분제를 대체할 정치 체제를 마련하려고 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이다.

 

• 그러한 정치 체제를 추구하는 사회 상태는 <대응 조건>을 반드시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위계질서 조건>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T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 체제의 방법론은 T가 <대응 조건>과 <위계질서 조건>을 만족하는 신분제 사회 상태의 S로 퇴보하도록 하는 가능성도 차단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신분제가 붕괴된 사회 상태가 신분제 사회 상태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세속화 과정의 핵심인 신분제 붕괴 과정은 문화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오랜 기간 후의 사회 상태를 단 한 번의 계기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은 발생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신분제를 대체할 정치 체제의 방법론은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분제를 대체할 정치 체제의 방법론은 기득권층 제어론과 밀접히 맞물릴 수밖에 없다. 신분제 붕괴 과정은 상위 계급으로 인식되는 기득권층의 해체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