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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

착한왕 이상하 2016. 2. 29. 20:19

고대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 -

 

 

1.

러시아 사회 민주당에서 레닌을 지지한 볼셰비키 파가 혁명에 성공하자,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희망했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은 공산당 독재 체제로 끝났고, 그들의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민주주의 옹호자들은 공산주의가 결국은 독재 정부 형태의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옹호할 때 볼셰비키 혁명 결과 그 증거로 들곤 한다. 또한 자유 민주주의 옹호론자들 중 일부는 공산주의를 적대시하기 위해 볼셰비키 혁명 결과를 사용하곤 한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가급적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오로지 자유 민주주의만이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 이상과 부합하다는 입장을 펼친다.

 

그러나 정당 민주제로 대표되는 현대 민주주의가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이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증후군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의 본고장으로 여기는 미국에서 최근 벌어진 사건만 보더라도, 이는 단순한 기우만은 아니다. 그 사건은 미국 국가안보국(NAS)의 개인 정보 수집 행위를 폭로한 대가로 국가의 반역자로 몰린 스노든을 두고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국가 기밀 사항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 그 기소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정당하려면, 국가 유지를 위한 정부 권력이 시민의 자유보다 우선해야 한다. 더욱이 시민 개개인의 정보를 정부가 파악하는 것은 국가 유지에 필요하다는 전제가 뒤따른다. 그러한 전제는 권력의 원천이 시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통념에 반하는 것이다. 물론 투표제에 의한 정당 간 경쟁은 일인 혹은 일당 독재를 막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를 인정하는 한, 정부의 구성하는 직업 정치가들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수도 있다. 정부의 권위가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법적으로 보장되기 때문에, 투표로 당선된 정치가들이 공약을 지키지 않아도, 심지어 자신들의 이권에 따라 행위해도 그들을 법적으로 처벌하기 힘들다. 이러한 까닭에, 최근 들어 민주주주의 정치론의 원래 바탕인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고 있다.

 

 

2.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는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실현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약 200년 이상 실천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는 ‘직업 정치가’들을 특별한 사회 계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가들로 구성된 세력은 아테네라는 도시 국가에는 없었다. 직업 정치가들 없이도 아테네는 번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 사회는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가 가능하다는 입장에 대한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의회의 주 역할은 법안과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현대 정당 민주제의 의회는 투표를 통해 걸러진 직업 정치인들로 구성된다. 이와 달리, 아테네 의회는 시민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공론화하고 토의에 부칠 수 있는 수 있는 장소였다. 법이나 정책을 만드는 별도의 권력 주체가 아테네 사회에서는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업 정치가나 직업 정치가들로 구성된 정당과 같은 것도 없었다. 따라서 아테네 의회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관심사를 표출하기 위한 집회 성격의 모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의회에서 체결된 정책을 시행하는 곳은 ‘협의회(council)’들이다. 협의회들은 약 500여 명의 시민들로 구성된다. 그러한 시민들은 직업 정치가도, 관료도 아니다. 그들은 제비뽑기 방식과 유사한 추첨을 통해 선발된 보통 시민들이다. 협의회 소속 시민의 임기는 1년이기 때문에. 협의회는 매년마다 구성된다. 각 시민은 일생 동안 최대 두 번까지만 협의회 소속으로 활동할 수 있다. 법 집행을 관할하는 곳은 ‘시민 법정(people's court)’이다. 시민 법정의 판사들 역시 추첨을 통해 뽑힌 시민들이다. 단지 위기 때 공동체를 위해 전략을 짜고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장군들만 시민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직업 정치가에 의한 의회와 정부 구성은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 끼어들 구석이 없다. 정치가 집단이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 이상에 다가가는 데 방해물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가 적어도 이론적 측면에서는 현대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실례로 다음과 같은 반론을 들 수 있다.

 

•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노예 계층을 생산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남성들로 구성된 시민 계층은 노예 계층과 비교해 귀족층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는 상대적 소수인 시민 계층이 단합하여 사회를 이끌어 가기 위한 ‘가진 자들의 동기’가 깔려 있다. 또한 직접 민주주의는 규모가 큰 현대 사회를 유지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다.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이상에 직접 민주주의가 더 가까운 것은 맞지만,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과 유지는 항상 대내 및 대외 관계 맥락에 의존적이다. 직접 민주주의에서 의사 결정 과정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기 때 국가 관리가 어려워진다.

 

노예 계층을 제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직접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에 근거한 반론’만 남게 된다. 그 반론을 자세히 보면,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과 유지가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다. 직업 정치가 계층에 의한 정치 혹은 국가 권력을 대리할 정부 등이 그 반론에 근거해 설득력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그 반론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과 유지를 최상의 목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목적에 비추어서도 유효한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이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해 진다.

 

 

3.

정당 민주제로 대표되는 현대 간접 민주주의는 정말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이상에 다가 가는 데에도 직접 민주주의보다 효과적일까?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려면, 다음 조건을 충족하는 정치가들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수이어야 한다.

 

• 책임성

투표를 통해 선출된 정치가가 공약을 지키지 않거나 바람직한 인물이 아님이 밝혀져도, 그를 정계에서 퇴출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정당 민주제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정치가는 자신이 말한 것에 책임을 질줄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

 

• 공익성

민주주의의 이상을 존중하는 정치가는 사익보다는 공익을 중시해야 한다. 공익을 중시하는 것이 반드시 정치가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것일 필요는 없다.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정치가는 무조건 사익에 따라 선택하고 행위해서는 안 된다.

 

• 대표성

책임성과 공익성 조건을 만족하는 정치가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위 세 조건을 충족하는 정치가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선거로 당선된 정치가들 중 자신의 공약을 지키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선거 때 정치가가 내세운 공약을 국가 경영에 그대로 적용하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공약을 내세울 당시 환경이 선거 후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또 선거 때 정치가들이 내세우는 공약은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날조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임기 기간 동안의 직업 정치가들의 의사 결정은 명백한 범법 사항이 아니라면 사후 잭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의사 결정은 법적으로 보장받도록 권위를 누린다. 이 때문에, 정당 민주제로 대표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책임성 조건을 만족하는 정치가들이 많다고 할 수 없다.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한 직업 정치가라고 해서 시익을 쫓는 것은 아니다. 직업 정치가가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는 다수의 표를 얻을 목적으로 사익과 거리를 두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업 정치가가 영원히 직업 정치가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선거로 당선된 후 자신의 장래를 위해 정치가의 지위를 남용하는 이들도 많다. 더욱이 정치가의 표면적 발언만 가지고 정치가를 평가하는 시민들도 많기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정치가들도 생겨난다.

 

각 정당은 다른 정당과는 구분되는 정책적 노선이나 이념을 갖고 있다. 물론 선거 때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러한 정책적 노선이나 이념의 차이는 가시화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적 노선이나 이념은 정당이 시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모아 세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다. 정치가가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려면, 그는 구체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시민들과 함께 그 해결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다수의 직업 정치인들은 특정 정책적 노선과 이념만 내세워 시민들을 선동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기 바쁘다. 이때 정치가들은 단지 특정 이념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에 불과하며, 갈등 중재에 의한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진정한 정치’는 정치가들에 의해 가로 막힌다.

 

 

4.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 이상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직업 정치가들이 충족해야 할 최소한의 세 가지 조건은 책임성, 공익성, 대표성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 세 가지 조건들을 충족하는 정치가들이 다수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 세 가지 조건들을 충족하는 정치가들이 다수가 되는 세상을 바라는 것은 마치 과거에 현명한 왕에 의해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도래하길 바라는 것과 같다. 이를 받아들이면, 다음을 인정해야 한다.

 

•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과 유지를 위해서는 직업 정치가 계층 및 정치가들로 구성된 정당 간 균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자. 이 경우에도 현대 간접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당 민주제를 통해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점차 다가갈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위 결론에 대해 수긍한다면,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간접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로 대체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대체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진화가 직접 민주주의의 귀결을 뜻하는 것이라면, 부분적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사회에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 통신 기술을 바탕으로 한 의사소통 체계가 발달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현대 사회에 허용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정치가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 국민 소환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관료나 공직자들은 과학, 경제, 교육 등에서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정치가들의 권력에 종속될 수 있기 때문에, 시민들에 의해 지역별로 선발된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책 협의회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무선적으로 선출된 시민들로 구성된 지역별 시의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은 2003년부터 그러한 시의회 구성 방식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가려면,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사회에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바람직한 정치가’란 어떤 인물일까? 다음 입장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를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정치에 반드시 직업 정치가들이 필요하다. 직업 정치가들로 구성된 의회와 정부가 없다면,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과 유지는 불가능하다. 부분적이나마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은 사회에 혼란만 불러오기 때문에 민주주의 이상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 덧글

‘British Columbia Citizens' Assembly on Electoral Reform’에 대해서는 다음 사이트를 참조하라.

http://participedia.net/en/cases/british-columbia-citizens-assembly-electoral-reform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다음 사이트의 논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Christopher Blackwell, ed., Dēmos: Classical Athenian Democracy (A. Mahoney and R. Scaife, edd., The Stoa: a Consortium for Scholarly Publication in the Humanities)

http://www.stoa.org/projects/demos/home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민주주의를 다룬 어설픈 대중서, 정치 평론가나 논객들의 잡글, 각종 신문사 정치 칼럼보다는 위 사이트의 논문 몇 편을 정독하는 것이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