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후기: 세 번째 종류의 독단적 지성사(막스 베버)

착한왕 이상하 2016. 1. 8. 00:49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를 가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인물들 중 베버 형제가 있다. 특히 축의 시대에 형성된 종교를 주술성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기는 야스퍼스의 관점은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베버는 야스퍼스와 달리 기독교의 모든 종파를 주술성에서 벗어난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톨릭은 주수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낡은 종교였다.

 

   베버는 가톨릭 미사의 설교 시간이 개신교의 설교 시간보다 짧다는 점에 주목한다. 개신교의 설교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역할과 관련된 도덕적 요소가 들어가 있는 반면, 가톨릭 미사의 제의에는 공동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초자연적 힘에 호소하는 주술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한 주술성과 가톨릭 성체의 의미, 초자연적인 것에 자신을 내맡겨 신에게 봉사하겠다는 것의 구분을 사소하게 여기고, 설교 시간과 주술성의 정도가 반비례 관계를 맺는다고 규정한 것이다. 또한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혹은 인간의 수호신 성격을 갖는 천사들을 가정하는 가톨릭 교리를 다신교의 일종으로 해석했다. 그러한 수호신 성격의 천사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루터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이 때문에, 천사의 역할을 단지 신을 돕는 것에 국한시킨 칼뱅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베버가 개신교 윤리를 언급하면서 개신교를 그 어떤 종교보다 합리화된 종교로 평가할 때, 그 개신교는 어디까지나 칼뱅 전통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청교도 종파를 뜻한다.

 

베버는 사회 상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종교 내 세력들의 노력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실례로 당시 가톨릭 내부의 개혁 운동을 무시했다. 그러한 개혁 운동을 사소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개신교 윤리, 특히 칼뱅 전통에 영향을 받은 청교도 윤리가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에 결정적이었다는 그의 입장 속에 반영되어 있다.

 

개신교 윤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켰다. 농경 사회의 가톨릭 전통에서 노동은 죄악시 되었다. 반면 개신교에서 노동은 신에 봉사하는 과정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는 노동의 질을 향상시켰고, 사람들을 주술성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현세 구원을 더욱 강조하는 개신교 교리 덕에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것도 더 이상 죄악시 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개신교 윤리에 따르는 집단적 행위 방식이 생겨났고, 그러한 행위 방식이 초기 산업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막스 베버는 개인별 재산 및 저축 정도, 주식 매매 동향, 철로 기반 확장 정도, 농업과 산업 현장에서의 남성 노동자 비율, 영아 사망률 등을 고려하여 개신교도 수와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규명했다고 믿었다. 그러한 상관관계에 근거할 때, 가톨릭 기반의 지역은 자본주의 기반의 산업화가 촉진되기 힘든 곳이다. 제아무리 가톨릭 세력이 내부 개혁을 운동을 진행해도, 그 교리가 개신교적으로 되지 않고서는 가톨릭 윤리는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을 촉진시킬 수 없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시각 때문에 베버가 사회학의 대부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회통계적 방법을 사용해 개신교도 수와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려고 한 방법론적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현대적 사회학의 형성 과정에 대한 베버의 기여를 인정해도, 그러한 상관관계가 성립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상관관계에 근거한 베버의 입장이 미국에 상륙해 교과서화되면서, 다음과 같은 <베버의 궁극적 관점>20세기 세계화 물결을 타고 퍼져 나가 일종의 신화처럼 되었다.

 

<베버의 궁극적 관점>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형성에 적합한 고유의 심리적, 문화적 태도가 있으며, 개신교 윤리는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에 적합한 고유의 심리적, 문화적 태도이다.

 

특정 사회의 경제적 발달 과정을 폭넓게 논할 때, 그 사회의 문화 및 구성원들의 심리적 태도 등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로부터 그러한 발달 과정에 적합한 고유의 문화 및 구성원들의 심리적 태도가 있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점은 경제적 발달 과정을 초기 산업 자본주의에 국한하는 경우에도 성립한다. <베버의 궁극적 관점>이 기대고 있는 토대, 즉 개신교도 수와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 사이의 상관관계가 부정되면, 그 관점은 경험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이를 보여 주는 연구 결과는 상당히 많이 축적된 상태이다. 그러한 연구 결과를 여기서 분석할 필요는 없다. <베버의 궁극적 관점>특정 지역의 역사를 보편화한 일종의 신화임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베버가 개신교도 수와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려 했을 때, 그의 연구 대상이 된 지역은 주로 바덴 지역이었다. 그 지역은 칼뱅 전통의 청교도 세력과 루터 전통의 경건주의 세력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베버가 자본주의를 개신교 윤리와 연관시킬 때, 그 윤리는 어디까지나 청교도 윤리에 국한된다. 루터 전통에 대한 베버의 반감을 고려하는 경우, 베버는 두 세력을 구분하여 지역 경제를 좀 더 세밀히 분석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욱이 독일의 당시 산업화 거점 지역들은 라인 강을 따라 구축되어 있었고, 해당 지역들 다수는 가톨릭 세력권에 속했다. 독일 산업화의 이러한 지리적 분포를 고려한다면, 칼뱅 전통의 청교도 윤리가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에 적합한 고유의 심리적, 문화적 태도라고 단언할 수 없다.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우, 종교 갈등기 이후 지역별 기독교 종파 분포 방식은 약 3세기를 거쳐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독일도 이에 대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라인 강 주변의 가톨릭 지역이 독일의 산업화 기반이었다는 사실은 베버의 입장에 대한 더욱 강한 반례가 되는 것이다. 물론 베버의 옹호자들은 소수 청교도 지도자들만으로도 초기 산업 자본주가 형성 가능했다는 반론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은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엘리트적인 발상이다.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 과정을 유럽 전체로 확대시켜 살펴보면, 철도망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은 강과 운하망이다. 강은 산업 기반에 필요한 용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운송 통로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과 운하망을 기반으로 산업화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방식을 베버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산업화 기반은 가톨릭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영국의 경우 청교도 세력이 산업 혁명을 주도했다는 통계적 증거는 없다.

 

독일의 초기 산업 자본주의 형성 과정을 유럽 전체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경우, 청교도 윤리가 그러한 과정에 적합한 고유의 심리적, 문화적 태도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베버 옹호자들은 이를 반박해 주는 증거를 들어야 한다. 실례로 19세기 중엽 이후 독일의 급속한 발달을 들 수 있다. 직업군별 능력을 우선시하는 관료제를 바탕으로 한 개신교 세력의 개혁 운동이 그러한 발달을 주도했다고 회자되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베버의 궁극적 관점>은 개신교 윤리가 초기 관료제에 적합한 고유의 심리적, 문화적 태도라는 입장을 함축한다.

 

나에게 베버의 합리화라는 것은 여전히 파악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것이지만, 그가 사회의 합리화 정도관료화 정도로 평가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관료화되면 될수록,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불필요해 진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실현에 대한 필요악으로 자본주의를 여긴 것처럼, 개신교 윤리란 사회가 합리화되는 데 필요하다는 논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세속화 관점이 그러한 논리에 기대는 경우, 개신교 윤리는 사회의 세속화에 대한 필요악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 사회가 세속화되려면 개신교 윤리의 특징들이 적어도 한 번은 사회에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 작업의 논의에 따를 때 터무니없는 것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다룰 때 19세기 중엽 이후에 주목하는 이유는 특별한 것이 없다. 그 시기에 이르러 종교의 사회적 지배력이 급격히 약해 졌고, 직업군의 다양화와 함께 사회의 계층 분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화와 함께 개인의 삶도 더 이상 하나의 가치 체계 속에 종속되지 않게 되었다. 가정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이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생산 공장 활동이 요구하는 가치 체계들이 지역별로 유사성을 띤다고 해도, 개인들의 가정생활마저도 동일한 가치 체계의 지배를 받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19세기 세속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특징 들 중 하나는 여러 가치 체계들을 이동하는 존재로 개인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점은 유럽의 초기 산업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에도 성립한다. 만약 베버가 주목했던 바덴 지역의 가정과 직장 생활이 정말 동일한 청교도 윤리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면, 그 지역은 단지 예외일 뿐이다. 그 지역 발전을 유럽 전체에 걸쳐 보편화시킬 수 없으며, 바덴 지역의 가정과 직장 생활이 공통적으로 청교도 윤리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지도 사실 의심스럽다.

 

<베버의 궁극적 관점>특정 지역의 역사를 보편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청교도 윤리가 부재한 곳에서는 자본주의가 형성되기 힘들다. 이를 받아들이면, ‘여기를 포함한 동북아권 지역들은 청교도적 가치 체계를 흡수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산업화되기 쉽다. 이러한 입장은 산업화 성향만을 가지고 근대화를 논하는 방식의 맹점을 그대로 보여 준다. 세속화와 근대화의 관계를 논하는 곳에서 지적된 그 맹점은 근대화 과정이란 뒤쳐진 곳혹은 주변앞선 곳혹은 중심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한 비판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베버의 궁극적 관점>이 여전히 이 땅에서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개신교 종파들이 갖는 특성들 차이를 무시한 채 베버처럼 주장한다. 개신교 윤리학이 이 땅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었다고 말이다. 또 일부 학자는 이 땅의 경제 발전 과정을 베버의 입장에 대한 반례로 들면서 유교 자본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유교의 가치 체계가 여전히 가정에서 직장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성립한다. 유교의 전통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맞지만, 현재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복잡성이 유교적 가치 체계로 귀결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더욱이 유교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특정 경제 발전 방식에 적합한 심리적, 문화적 태도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베버의 사고방식과 닮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유교 자본주의는 베버의 사고방식에서 강조된 개신교 윤리유교적 가치 체계로 대체하고 자본주의의 다양한 측면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