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저기'와 '여기'> 머리말 완성본

착한왕 이상하 2016. 4. 25. 02:26

* 과거에 올린 머리말은 삭제했다. '원고 구성 방식'에 해당하는 도식 이하 부분은 새롭게 덧붙여진 것이다.지금 올린 것을 약간 수정해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머리말로 사용할 것이다.

 

 

머리말

 

세속화(secularization)는 일반적으로 과학이나 정치 등의 분야가 종교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뜻한다. 종교 교리가 특정 이념으로 해석될 때, 세속화는 그 어떤 이념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끌려가지 않게 된 상태를 뜻한다. 세속화된 사람이란 어떤 이념에 관심을 갖더라도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진 이들을 뜻한다. 따라서 그 어떤 종교 교리에 삶의 지도를 내맡기길 거부하는 무종교인(無宗敎人)은 적어도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세속화된 사람이다.

 

무신론자가 무종교인일 수 있지만, 무종교인이 무신론자일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 개념의 광의성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무신론자는 기독교 교리에 등장하는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을 거부하는 인물로 어떤 반기독교적 이념을 갖고 있다. 무종교인이 그러한 반기독교적 이념을 따를 이유는 없다. 무종교인에게 모든 종교는 열려 있는 반면, 무신론자에게는 아니다. 여기서 열려 있다는 것은 그가 어느 순간 특정 종교에 귀의하게 될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 교리의 진위여부를 따지는 정당화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무종교인의 태도를 상징한다. 무종교인은 교리의 생성 역사,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는 관심을 갖더라도 교리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래서 무종교인의 목적은 무신론자처럼 신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신이 존재하든 말든, 이것은 무종교인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세속화 논쟁의 상당 부분은 무종교인이 아니라 무신론자의 관점애서 진행되어 왔다. 이렇게 진행된 방식의 세속화 논쟁은 이 땅의 과거와 현재에 적용될 수 없다. 이 땅의 과거 역사는 기독교 교리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유신론을 함축한 교리만이 종교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세속화된 사회 상태가 종교성을 사장한 상태라면,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한 상태를 가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실천 목적이 될 수 없다. 더욱이 무신론 관점 중심의 세속화 논쟁은 서양의 실제 세속화 과정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벌어진 과학과 종교의 복잡한 거래 관계마저도 왜곡시킨다. 그 결과, ‘세속화라는 표현에 그 근거가 애매모호한 과학적 합리성’, ‘무신론적 세계 이해 방식등의 상징성을 갖다 붙여 세속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탈인간화’, ‘인간의 속물화등의 상징성을 갖다 붙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현상이 생겨났다.

 

세속화 논쟁의 또 다른 부분은 특정 지역의 역사적 과정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보편화시키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세속화 과정에 고유한 것들이 가정되었다. 그러한 것 없이는 세속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저기의 지성사, 곧 서양의 지성사에서 가공된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여기의 현실, 곧 이 땅의 현실을 진단하려 들었다. ‘세속화 과정에 고유한 것으로 가정된 것들이 정말 저기의 역사에 적용 가능한 것일까? ‘저기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만 한 것이 여기에도 있었는가? 그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은 채, ‘계몽의 필요성’, ‘탈유교화의 필요성등을 강조했다. 자신들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단순한 제거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현실 공간의 문제들을 목적 정당화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이때 남는 것은 문제의 고착 상태밖에 없다.

 

무종교인의 관점에서 저기여기를 비교할 때, ‘저기여기를 동시에 통합할 수 있는 세속화 담론이란 환영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환영이 동질화 될 수 없는 사회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제거될 때, 세속화 논쟁의 중심축은 무종교인의 관점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를 보이기 위해 이 작업에서 다루어질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세속화된 사람은 무신론자이어야 하는가? 무종교인 및 무신론자의 의미는 고정된 것일까? 선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기독교만의 특색인가? 사후 구원의 매개물은 불멸의 영혼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가? 서양의 자유주의는 기독교 전통에 반하는 것인가? 종교 선택의 자유는 의무화된 종교 교육에 대한 충분한 반박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 등 종교는 도덕의 기원인가? 세속화 과정은 종교가 사장되는 과정인가? 정교 분리의 원칙은 세속화된 사회 상태의 기능에 전제된 것인가? 지동설은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약화시켰는가? 지동설에 대한 진보적 반응으로 형성된 계몽주의는 사회가 세속화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고방식일까? 계몽주의는 반종교적 색체를 띤 사고방식인가? 계몽주의는 보편적 인권 개념을 전제한 사고방식인가? 근본주의라는 개념은 이슬람에서 기인한 것일까? 힘이 강한 지역의 종교가 다른 지역에 들어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화 전쟁은 여기의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있었는가? ‘여기의 개신교 세력이 벌이고 있는 해외 봉사 활동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거리가 먼 순수 봉사 활동인가? 현대 우주론, 실례로 빅뱅 우주론은 기독교적 세계 이해 방식과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과학적 지식 체계는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전제하는가? 신의 속성을 성경에서 찾아보려는 입장과 자연에서 찾아보려는 입장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가? 지적 설계자 개념을 함축한 자연 신학은 창조 과학 옹호론에 사용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신 개념은 하나인가? 창조설은 성경 문구에 국한해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과학에서 요구되는 자연주의는 기계론, 유기체론 등의 세계 이해 방식인가? 생물계의 진화 과정은 오로지 자연선택에만 근거하는 것인가? 자연선택을 생물학의 통합 원리처럼 주장하는 세력은 지적 설계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 세력인가? 진화 생물학은 무신론을 증명해 주는가?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은 세속화 과정이 사소하거나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세속화 과정은 과거 전통과의 단절을 거쳐야 실현 가능한 것인가? ‘여기는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쳐 세속화된 곳일까? ‘저기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직접적으로 대응시켜볼 만한 과정이 여기에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는 경우,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내용적 측면에서 저기의 세속화 과정과 유사할까? ‘저기의 경우, 세속화된 사고방식이란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세속화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성립 가능한가? 특정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의 형성 과정을 논할 때, 그 방식과 모순되는 세계 이해 방식은 고려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유교는 신분제를 옹호하지 않는 방식으로 변통할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 이해 방식이었을까? ‘여기가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한 실제 과정은 유교의 그러한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과정이었을까? 유교의 그러한 변통 가능성이 실현될 조짐조차 없었는가? ‘여기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은 서양 역사의 전개 방식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일까?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의 개념적 기원은 여기저기모두에서 동일한 것일까?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구상되고 실험된 다양한 정치 체제들은 여기저기의 구분 없이 논할 수 있는 것인가? ‘세속화근대화는 무조건 혼용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근대화 과정은 산업화에서 앞선 저기여기가 모방 수용하는 방식으로만 진행되었을까? 근대화의 여러 성향들을 고려할 때, ‘여기가 근대화의 지역적 확산 과정에 기여한 것은 없는가? ‘여기의 실질적 다수인 무종교인 계층의 의견은 정치 영역에서 고려되지 않는 상황인데,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 진화에서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

 

위 물음들은 이 작업에서 모두 부정될 것이다. 이 작업의 목적 중 하나는 위 물음들을 부정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사례와 지식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가운데,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저기'와 '여기'의 과정이 동질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할 것이다. '세속화'로 불릴 만한 성향들이 과거에는 아예 없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단지 과거에는 지금과는 다른 여건으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땅은 서양에 비해 세속화로 불릴 만한 성향들의 지속성 없이도 세속화된 곳이다. 그러한 성향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서양에 비해 최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저기여기보다 더욱 세속화되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정의 길고 짧음이 과정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은 그 길고 짧음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방식이 보여 주는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을 망각하는 경우, ‘저기에만 해당하거나 해당하는 것처럼 과장된 역사 읽기 방식 속에 여기의 현실을 가두어 버리기 쉽다. 그 결과는 현실 왜곡이며, 정작 여기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들은 담론의 표면으로 부상할 수 없게 된다.

 

이 작업의 또 다른 목적은 부분적으로나마 저기여기의 역사를 비교 분석하기 위한 개념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개념 틀은 결코 모든 역사에 공통된 어떤 보편적 구조와 같은 것에 근거할 수 없다. 그러한 보편적 구조는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에 대한 인식 부재에서 가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 틀은 여기의 현실 문제 진단을 가로 막는 역사 서술 방식을 해체하는 것에 근거해야 한다. 이 작업에서 독단적 지성사로 규정될 그러한 역사 서술 방식들로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 방식’, ‘인물들의 사고방식을 도외시 하고 주장들만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 방식’, ‘특정 시대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시대를 단절 맥락 속에 가두어 버리는 역사 서술 방식’, ‘세속화 과정을 종교성의 사장 과정으로 규정하는 역사 서술 방식’, ‘세속화된 사회 상태를 기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의 세속화로 규정하는 역사 서술 방식’, ‘계몽주의 운동을 세속화 과정의 필연적 단계로 묘사하는 역사 서술 방식’, ‘특정 지역의 역사를 보편화시키는 역사 서술 방식등을 들 수 있다. 그러한 역사 서술 방식들은 저기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저기뿐만 아니라 여기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독단적 지성사들의 유혹에서 벗어나야지만, ‘저기여기의 과거와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겨난다. 하지만 과거를 아는 것은 현실 문제 진단에 도움을 줄 뿐이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원천은 아니다. 과거와 달리,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들이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해 있다.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학문 간 경계 설정조차 힘든 상황이다. 사회의 여러 영역들 간의 중첩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더욱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려면,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담론을 생성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 펼쳐질 세속화 담론은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담론의 필요성을 정당화해 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작업에서 펼쳐질 세속화 담론은 역사적 담론이다. 역사적 담론이란 증거들에 의해 제한된 역사적 서술에 바탕을 둔 담론이다. 따라서 역사적 담론으로서의 세속화 담론은 주관적일 수 없다. 그렇다고 객관적일 수도 없다. 이 작업에서 다룰 문제들을 선별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에는 개인적 평가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담론으로서의 세속화 담론은 이 점에서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다룰 문제들은 저기역기의 세속화 과정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이 작업의 세속화 담론은 사회학적, 역사적, 인류학적, 철학적, 정치학적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복합적이다. 세속화 담론은 복합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특정 종교가 사회의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현실 속 문제들이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복합적 성격은 이 작업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세속화 담론의 복합적 성격을 처음부터 파악하고 이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이 작업의 출발점은 모 대학 연구교수직을 끝으로 학계와 자발적으로 절연한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기는 여기의 개신교 세력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자인가?’, ‘진화론의 허구를 밝히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 면접에 등장하는 현실에 대한 증오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행은 기독교 재단 대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곧 깨닫고, ‘저기여기의 세속화 과정을 비교 분석하는 담론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한 담론은 저기여기어느 곳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세속화 담론을 끝내는 데, 왜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이 작업은 다른 작업들과 병행되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연구 및 글쓰기에 집중할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소위 중산층에 진입하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영업을 하다 보니, 나의 작업에 집중할 시간을 내기란 녹녹치 않았다. 생각 속에서만 머물던 작업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 이 세속화 담론은 그 후 7~8개월 동안 작업한 결과물이다.

 

나의 작업들을 가로 막은 지난 시간이 잃어버린 시간만은 아니다. ‘자유와 평등’,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인간의 한계’, ‘세상을 버림으로써 뜻을 지킨다는 것’, ‘내 앞에 사물의 드러나 있음’, ‘논증과 지식의 전이’,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등에 대해 글자를 멀리하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준 시간이었다. 입시에 매몰된 교육의 폐해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고, 자영업자로서 계층들 간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준 시간이었다. 사실 교육은 여기뿐만 아니라 저기에서도 문제이다. 어느 곳이나 목적만 미래 지향적일 뿐 수단은 과거에 구속되어 있는 사회 영역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소득 및 교육 격차를 기준으로 계층들을 구분하고 분석하는 방식은 현실 문제 해결에서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정치적 실험들은 일어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난 시간 동안 고민했던 것들은 이 작업에도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세속화 담론의 성격에 국한해 지극히 제한적으로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이 작업은 총 185부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4장으로 구성된 제 1부의 목적은 이어지는 심화된 논의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과학을 둘러싼 논쟁은 제 5장에서 7장으로 구성된 제 2부의 주제이다. 8장에서 11장으로 구성된 제 3부의 목적은 사회가 세속화된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저기여기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12장에서 15장으로 구성된 제 4부에서는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고, ‘여기의 현실을 진단해 볼 것이다. 16장에서 18장으로 구성된 제 5부의 목적은 이 작업에서 펼쳐진 세속화 담론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저기여기의 비교에서 피해야할 독단적 지성사를 해체하는 것이다.

 

세속화를 둘러싼 일상적 논쟁에 필요한 지식 정도만 원하는 사람은 제 1부만 읽어도 된다. 그러한 지식을 넘어 과학과 종교의 관계 및 과학의 세속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제 1부와 2부는 읽어야 할 것이다. ‘저기여기에서 나타는 세속화 과정의 차이, ‘여기의 현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제 1, 3, 4부는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저기여기의 사회 역사적 과정들을 비교 분석하는 방법론까지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 작업 전체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읽는 방식들은 다음 도식 속에 반영되고 있다.

 

 

위 도식에 함축된 같은 글쓰기 지도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세속화 주제와 연관된 여러 학적 입장들, 실례로 세속화 과정을 마치 종교가 사장되는 과정으로 묘사한 입장, 세속화 과정에서 계몽주의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입장,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어떤 이해 방식이 종교에 의해 발견되고 진화해온 방식으로 세속화 과정을 규정하는 입장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저기의 사람들이 세속화라는 목적을 의식하고 세속화 과정을 추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속화 과정에 대한 학적 입장들을 멀리하고, ‘저기의 과거에서 엿볼 수 있는 성향들에 주목했다. 그러한 성향들은 과학, 종교, 정치 등 사회의 영역들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과거 학자들의 입장도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한 입장은 과거 특정 시대의 변화 조짐에 대한 지적 반응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학자들의 입장보다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시대의 변화 조짐에 대한 저기지식인들의 지적 반응으로서의 사고방식, 그러한 변화 양상을 불러일으킨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보는 가운데, ‘저기의 세속화 과정에 대한 거시적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

 

저기의 세속화 과정에 대한 거시적 그림은 실제 역사적 사례들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그림을 여기에 적용할 수 없었다. ‘저기여기의 역사적 경로는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의 과거에서 세속화로 불릴 만한 성향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여기의 과거는 그러한 성향들이 일어날 조짐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일관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여기저기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서도 세속화된 곳이다. 이러한 주장이 서먹하게 들리는 이유는 선입관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 선입관이란 어떤 과정은 그 어떤으로 불리는 역사적 성향들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실현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그러한 관점은 단지 역사를 특정 보편적 발달 구조에 가두어 버리는 잘못된 사고방식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잘못된 사고방식에는 유럽이 세계의 중심축으로 떠오른 이후의 유럽 중심 사관의 환영이 배어 있다. ‘여기는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세속화된 곳이기 때문에, ‘저기의 이론을 빌려서 여기를 진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어불성설에 가까운 짓들이 여기에서 자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풍(學風) 부재를 담론화하는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보게 되듯이, ‘저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이론들로는 여기근대화의 의미 규정조차도 어렵다.

 

여기의 역사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있었는가? 그러한 것은 실현될 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세속화로 불릴 만한 사건들이 비록 일관되게 이어져 역사적 성향으로 굳어지지 못했지만, 그 사건들은 그것들의 가로막은 것들과 뒤엉켜 전통의 측면으로 여기의 현실에 배어 있다. 따라서 여기의 역사에도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가상의 역사에서 벌어졌을 만한 정치적 실험들저기정치적 실험들과 비교해 보았다. 이를 통해, ‘저기여기가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게 된 과정에서 나타나는 차이, ‘저기보다는 여기에서 중요한 현실 문제들, 그리고 부분적으로나마 그러한 문제들을 접근하는 효과적인 방법들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게 된 과정에서의 저기여기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지나치게 유사성을 강조하거나 차이성을 강조하는 지성사 및 특정 지역의 역사를 보편화시킨 지성사들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가 나에게 드러났다. 그러한 독단적 지성사들은 저기에서 생성된 것이지만 저기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여기에 적용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독단적 지성사들을 해체하는 것 자체가 문화 가로지르기 비교 방법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다루는 경우의 담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담론은 이어질 작업에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담론이 필요한 이유는 이 작업 전체의 논의들을 통해 분명해질 것이다.

 

이 작업은 유명한 특정 국외 인물의 이론이나 입장을 소개하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여기의 현실을 진단하는 데 필요하지만 간과된 주제들을 찾고 담론화시키겠다는 동기가 이 작업에 깔려 있다. ‘여기에서 필요하지만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들을 찾고 담론으로 체계화시키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지난 400여 년 간 강국의 담론에 기생한 곳이라는 집단적 불만감학풍 건설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당장 현실 문제 해결에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나 같은 사람이 민족주의에 빠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 땅은 내가 태어난 곳이며, 이 땅의 언어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앞섬이 있는 학문적 풍토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물론 이러한 기대는 허황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작업 전체를 훑어본 사람은 분명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에서 바라본 저기지성사의 전체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