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후기: 중단과 이행

착한왕 이상하 2016. 2. 29. 02:06

* 다음은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후기 마지막에 해당한다. 800여쪽 분량의 원고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 글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세속화로 불릴만한 성향들이 현실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과정들은 동질화될 수 없다. 그러한 성향들이 과거에는 아예 없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단지 과거에는 지금과는 다른 여건으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땅은 서양에 비해 세속화로 불릴만한 성향들의 지속성 없이도 세속화된 곳이다. 그러한 성향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서양에 비해 최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 땅이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서도 세속화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하지만 이로부터 저기여기보다 더욱 세속화되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정의 길고 짧음이 과정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은 그 길고 짧음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화라고 불릴만한 성향들이 저기에서 오랜 지속성을 띠고 현실을 대표하게 되었다고 해서, ‘저기의 지역별 차이를 무시하고 그 세속화 과정을 일률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을 인식할 때 당연한 것이다. 이 작업에서는 다만 저기여기가 동질화될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해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한 큰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여기에서 실현될 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봄으로써, 세속화 과정이 진행되는 방식은 내용적으로 동질화될 수 없음을 보였다.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날조된 것이 아니다. 신분제의 흔들림, 왕권의 약화, 유교의 변통 가능성 등 저기의 세속화 성향들에 대응시킬 수 있는 조짐들이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조짐들이 역사적 성향으로 규정될 만큼 지속될 수 없었을 뿐이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방식이 보여 주는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을 망각하는 경우, ‘저기에 해당하거나 저기에도 해당하지 않는 역사 읽기 방식 속에 여기의 현실을 가두어 버리기 쉽다. 그 결과는 현실 왜곡이며, 정작 여기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 실례로 무종교인의 딜레마가 민주주의의 딜레마로 규정되는 문제등은 담론의 표면으로 부상할 수 없게 된다.

 

세 가지 종류의 독단적 지성사들은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에 대한 인식 부재 속에서 저기여기에 통용될 수 없는 역사관들을 생성시킨다. 특정 시대의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관점은 단절의 논리를 강화시키는 첫 번째 종류의 독단적 지성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어떤 시대를 대표하는 성향들은 단순히 과거 전통의 계승도 아니고, 과거 전통을 사장시킨 결과도 아니다. 그러한 성향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과정에는 과거 전통에 대한 극단적 부정이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그러한 모든 성향들 자체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단절 논리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방식을 설명해 주는 보편적 도식과 같은 것으로 규정되면, 지역별 문화적 특성에 따른 역사적 과정의 생성적 측면은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축의 시대 개념을 통해 본 두 번째 종류의 지성사는 축의 시대에 나타난 종교 및 사상들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한 유사성 강조를 통해 얻어진 가치는 인류사를 평가하는 규범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가치가 약화되는 과정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그러한 가치의 복원은 해당 사회의 과업이 된다. 따라서 역사적 과정의 지역별 차이는 그러한 가치의 실현 및 약화 정도의 폭 내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소위 축의 시대를 기준으로 인류사의 전후를 이분하는 것은 자의적이며, 세계 이해 방식들의 생성과 흐름 속에 배인 문화적 차이를 특정 가치 아래 위치시키는 것은 오히려 문제 해결에 필요한 소통을 가로 막는다. 더욱이 현실 속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모든 세계 이해 방식들이 축의 시대에 나타난 종교 및 사상들에 귀속되는 것도 아니다.

 

축의 시대 개념을 통해 본 두 번째 독단적 지성사는 사실 세속화 과정에 대한 잘못된 서술 방식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 잘못된 서술 방식은 종교의 지속적인 사장 과정으로 세속화 과정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종교의 사회적 권위가 약화된다고 해서 종교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이 점은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또한 모방에 의한 만족이 인간의 원초적 욕구라면, 종교성은 사라질 수 없다. 모방은 종교적 전통의 계승에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실제 세속화 과정이 사소한 것이거나 허구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으며, 인류사를 축의 시대 개념 틀속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통용될 수 없다.

 

특정 지역의 역사를 보편화시켜 버리는 세 번째 독단적 지성사에 빠지면, ‘차이우열 구분의 관점에서 확대해석하게 된다. 실례로 과거의 인습을 없애기 위해서는 서양의 계몽 운동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 땅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의식이 약한 이유는 청교도적 윤리관과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어느 나라의 무슨 식 교육을 들여와야 이 땅 아이들의 창의력이 높아진다는 등의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러한 주장에는 무엇을 위한 고유한 사고방식 및 문화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한 사고방식 및 문화의 확산 없이는 무엇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라는 공동의 목표는 현실 속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문제들을 제거했을 때 기대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들을 발생시킨 원인들을 추적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원인들은 이 땅의 역사적 경로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기의 특정 사고방식의 도입으로 단순히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과정의 비동질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세 가지 독단적 지성사가 저기여기를 휩쓴 결과는 세속화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평가 방식의 출현이다. 그 하나는 세속적인 것이라는 표현에 온갖 부정적 상징성을 갖다 붙여 잃어버린 것’, 실례로 공동체적 가치’, ‘종교성’, 심지어 신화적인 것의 복권을 강조하는 평가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것이라는 표현에 긍정적 상징성을 갖다 붙여 과학적인 것’, ‘합리적인 것’, ‘개인주의적인 것의 강화를 옹호하는 평가 방식이다. 어느 평가 방식을 따르든, 신분제가 득세했던 세속화 이전의 사회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사람은 없다. 또한 현재의 사회 상태를 무조건 이상화시키는 것도 터무니없다.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정말 세속화 과정에서 기인한 것인지, 산업화 성향으로 종종 대표되는 근대화 과정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지 못한 정치 및 경제 체제에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 일률적인 답을 줄 수 있는 이론은 없다. 만약 그러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허구일 뿐이다.

 

여기는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직접적으로 대응시켜 볼만한 것이 없이도 세속화된 곳이기 때문에, 세속화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평가 방식을 가지고 여기의 현실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 두 가지 엇갈린 평가 방식이 아예 과학 대 인문학의 갈등 관계로 나타나는 곳은 저기보다 오히려 여기이다. 물론 효율 중심의 과학적 관리법 및 전문화의 여파로 인문학이 대학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할 때, ‘세속적인 것과학적인 것’, ‘전문적인 것이라는 상징어를 갖다 붙이는 사례는 저기에서도 발견된다. ‘세속화 과정근대화 과정이 혼용 사용을 허용할 될 정도로 중첩되어 있는 저기의 경우, 그 과정에서 대학 교육이 국가의 효율적 관리 체제에 귀속된 측면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귀속 측면이 세속화 과정의 직접적 결과라고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산업화 성향의 가시화 속에서 나타난 국가 간 경쟁이 그러한 귀족 측면을 강화시켰다면, 이것은 세속화와 구분되는 별도의 근대화 과정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산업화 성향이 직업군의 분화와 함께 종교의 사회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는 있지만, 전문성의 명목 아래 진행된 대학 교육의 파편화자체가 세속화 과정의 필연적 수단이라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화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평가 방식이 과학 대 인문학의 갈등 관계로 나타나는 상황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여기는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서도 세속화된 곳이며, ‘세속화근대화를 함부로 혼용해 사용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것에 특정 상징성을 부여해 현실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기 전에, 이 땅이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면밀히 분석해야 마땅하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인간 중심 사상의 강화와 함께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을 여기의 역사에서 찾아보는 경우,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서양과 달리, 인간 중심 사상의 약화와 함께 그 조짐이 드러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은 실현 가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 실현 가능성을 가로 막은 요인들은 무엇인가? 유교적 가치 체계는 일제 강점기 및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해 사람들의 삶 속에서 기능하고 있을까?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개인들의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것은 단지 정치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의 확장에 그쳤을까? 아니면 전통을 대체할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으로 받아 들여졌을까? 경제 성장에 의한 재분배 효과 및 효율 만능주의의 확산은 여기사람들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이 작업에서 다루지 않았다. 이 땅이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세밀히 다루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작업은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이 땅이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이르는 실제 과정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은 이유는 있다. 첫째, 그러한 분석에 필요한 끈기가 나에게는 없다. 둘째, 과학과 인문학의 갈등과 같은 현재의 상황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는 정확히 진단될 수 없다. 과거를 아는 것은 현실 문제 진단에 도움을 줄 뿐이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원천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회가 세속화되는 과정의 상태와 이후의 사회 상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정 지역에 국한해 전자에서 후자의 사회 상태로의 이행을 분석하는 경우, 특정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이 주목 대상으로 떠오른다. ‘저기의 경우 기독교적 세계 이해 방식, 그리고 여기의 경우 유교적 세계 이해 방식을 들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이 다른 세계 이해 방식들과 단절되어 기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속화 과정의 흐름은 그러한 특정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의 흥망성쇠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반면에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더 이상 특정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을 중심으로 분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사회 상태에서는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들이 개인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속에서 요구되는 인문학과 과학의 역할은 깊이 다루어진 적이 없다. 그러한 역할을 다루기 위한 담론,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담론을 생성시키는 것이 이어질 작업의 목적이다. 그래서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을 남겨 놓는 상태로 이 작업을 마무리한다.

 

이 작업에서 부정된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세속화된 사람은 무신론자이어야 하는가? 무종교인 및 무신론자의 의미는 고정된 것일까? 선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기독교만의 특색인가? 사후 구원의 매개물은 불멸의 영혼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가? 서양의 자유주의는 기독교 전통에 반하는 것인가? 종교 선택의 자유는 의무화된 종교 교육에 대한 충분한 반박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 등 종교는 도덕의 기원인가? 세속화 과정은 종교가 사장되는 과정인가? 정교 분리의 원칙은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기능해야만 하는 것인가? 지동설은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약화시켰는가? 지동설에 대한 진보적 반응으로 형성된 계몽주의는 사회가 세속화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고방식일까? 계몽주의는 반종교적 색체를 띤 사고방식인가? 계몽주의는 보편적 인권 개념을 전제한 사고방식인가? 근본주의라는 개념은 이슬람에서 기인한 것일까? 힘이 강한 지역의 종교가 다른 지역에 들어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화 전쟁은 여기의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있었는가? ‘여기의 개신교 세력이 벌이고 있는 해외 봉사 활동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거리가 먼 순수 봉사 활동인가? 현대 우주론, 실례로 빅뱅 우주론은 기독교적 세계 이해 방식과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과학적 지식 체계는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전제하는가? 신의 속성을 성경에서 찾아보려는 입장과 자연에서 찾아보려는 입장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가? 지적 설계자 개념을 함축한 자연 신학은 창조 과학 옹호론에 사용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신 개념은 하나인가? 창조설은 성경 문구에 국한해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과학에서 요구되는 자연주의는 기계론, 유기체론 등의 세계 이해 방식인가? 생물계의 진화 과정은 오로지 자연선택에만 근거하는 것인가? 자연선택을 생물학의 통합 원리처럼 주장하는 세력은 지적 설계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 세력인가? 진화 생물학은 무신론을 증명해 주는가?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은 세속화 과정이 사소하거나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세속화 과정은 과거 전통과의 단절을 거쳐야 실현 가능한 것인가? ‘여기는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쳐 세속화된 곳일까? ‘저기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직접적으로 대응시켜볼 만한 과정이 여기에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는 경우,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내용적 측면에서 저기의 세속화 과정과 유사할까? ‘저기의 경우, 세속화된 사고방식이란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세속화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성립 가능한가? 특정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의 형성 과정을 논할 때 그 방식과 모순되는 세계 이해 방식은 고려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유교는 신분제를 옹호하지 않는 방식으로 변통할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 이해 방식이었을까? ‘여기가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한 실제 과정은 유교의 그러한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과정이었을까? 유교의 그러한 변통 가능성이 실현될 조짐조차 없었는가? ‘여기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은 서양 역사의 전개 방식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일까?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의 개념적 기원은 여기저기모두에서 동일한 것일까?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구상되고 실험된 다양한 정치 체제들은 여기저기의 구분 없이 논할 수 있는 것인가? ‘세속화근대화는 무조건 혼용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근대화 과정은 산업화에서 앞선 저기여기가 모방 수용하는 방식으로만 진행되었을까? 근대화의 여러 성향들을 고려할 때, ‘여기가 근대화의 지역적 확산 과정에 기여한 것은 없는가? ‘여기의 실질적 다수인 무종교인 계층의 의견은 정치 영역에서 고려되지 않는 상황인데,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 진화에서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

 

이 작업의 목적 중 하나는 세속화 과정 및 세속화된 사회 상태를 둘러싼 논쟁에서 필요한 역사적 사례 및 지식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례 및 지식들은 위 물음을 부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 다른 목적은 역사를 분석하는 개념 틀을 간접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을 망각한 역사관들, 그리고 무종교인이 멀리해야 할 역사 독법,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경우 피해야 할 역사 독법 등의 유혹에서 벗어나야지만, ‘저기여기의 과거와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겨난다. 그러나 과거를 아는 것은 현실 문제 진단에 도움을 줄 뿐이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원천은 아니다. 과거와 달리,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들이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해 있다.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학문 간 경계 설정조차 힘든 상황이다. 사회의 여러 영역들 간의 중첩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더욱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려면,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담론을 생성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 그러한 담론 생성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