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이상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자. 무선적으로 선출된 시민들로 구성된 어느 지역의 시의회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의회를 구성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와 함께 반국가주의(anarchism)는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는 정치 체제를 대표한다. 반국가주의는 향촌 기반의 조합 공동체제를 논할 때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주로 투표 제도에 기반을 둔 간접 민주제 형태를 띤다. 간접 민주제나 직접 민주제 모두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를 지향하지만, 전자의 실천 방법은 ‘정치가 계층에 의한 정치’, 후자의 실천 방법은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간접 민주제의 투표 제도는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계층 중 일부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수단이다. 그 권력이 민중에게 합법적 권위를 갖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일정 기준을 충족한 개인은 누구나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음’이 법적으로 보장된다. 그런 법적 보장 아래 자유로운 투표 절차를 거쳐 선출된 정치가만이 국민의 대표성을 가지며, 그의 정치적 권력 행사는 적법한 권위를 누린다. 또한 직업 정치가 집단을 제어하기 위해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선거는 주기적으로 열린다. 이러한 간접 민주제는 의회와 정부, 정치와 행정의 관계 구성 방식에 따라 여러 형태로 세분화된다. 그 어떤 경우에나 간접 민주제를 통해 사회 상태가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이상에 가까워지려면, 다음 조건들을 만족하는 정치가들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수이어야 한다.
• 책임성
투표를 통해 선출된 정치가의 행위는 위법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처벌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그가 공약을 지키지 않거나 현 정세를 풀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임이 밝혀져도, 그를 의회나 정부 조직에서 퇴출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정당을 중심으로 한 간접 민주제가 정상으로 기능하려면, 정치가는 자신이 말한 것에 책임을 질줄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
• 공익성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정치가는 사익보다는 공익을 중시해야 한다. 공익을 중시하는 것이 반드시 정치가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것일 필요는 없다.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정치가는 일시적인 사익에 따라 선택하고 행위해서는 안 된다.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는 것이 그의 인생 목적일지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타인의 평판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 대표성
책임성과 공익성 조건을 만족하는 정치가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대표한다. 그가 속한 정당이 다수의 표로 정권을 잡은 경우, 그리고 그의 의견이 정당의 정책 노선에 부합하는 경우, 그의 의견은 다수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당연해 보이지만, 위 조건을 명확히 정의하기란 어렵다. 정부의 구성 방식과 역할 등과 관련된 자유 민주주의, 복지 지향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 등에 함축된 개인 및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관점들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위 세 조건을 대할 때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 위 세 조건을 만족하는 정치가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상당수는 직업 정치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반감을 발생시킨 이유 중 하나는 직업 정치가들 대부분이 선거로 당선된 후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약을 내세울 당시 환경이 선거 후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자신이 내세운 공약을 국가 경영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선거 때 정치가들은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분별한 공약을 남발하기도 한다. 그런 정치가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다수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 점은 다수에게 득이 되는 진정한 공익이 무엇인지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정치가의 이중적 삶 논증>
• 기능적 관점에서 공익을 접근할 때, 다수에게 득이 되는 것만이 공익이라고 할 수 있다.
• 공익을 위한 대안 선택은 증거를 결여한 주장에 대해 의심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검토를 필요로 하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소수이다.
• 권력을 차지하길 원하는 정치가들 중 상당수는 민중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공약을 남발하고, 또 민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선동을 일삼는다. 그러한 공약이나 선동은 공익 실현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 따라서 그런 정치가들이 공익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할 때, 그 목적은 자신의 사익을 충족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그런 정치가가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더 크다.
위 논증의 결론을 ‘정치가의 이중적 삶’이라고 하자. ‘정치가의 이중적 삶’과 유사한 것은 멀리는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엿볼 수 있다. 정의(justice)는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주장의 모순적 측면을 지적하는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그것이다. ‘정치가의 이중적 삶’과 유사한 것은 가깝게는 미헬스(R. Michels)의 ‘과두제의 철칙’에서 엿볼 수 있다. 미헬스의 과두제의 철칙에 따르면, 정치가 계층에 의한 정치의 정부 형태는 민주제에서도 소수 기득권층의 지배 형태로 끝난다.
여기서 플라톤의 글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처럼 ‘정치가의 이중적 삶’과 유사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전제들을 반박하거나, 그것들의 비정합성을 지적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반박이나 지적은 <정치가의 이중적 삶 논증>과 같은 논증을 가지고 민주주의 등의 특정 정치론을 기능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됨을 보여줄 뿐, 그것의 긍정적인 기능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이 정의나 공익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규정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해서, 이로부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함축된 ‘현실적 안목’마저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 계층에 의한 정치’는 언제든지 ‘정치가 계층의 기득권화’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 안목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정치가의 이중적 삶’은 ‘정치가 계층의 기득권화’를 우려하는 민중의 현실적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책임성 조건에 대한 의심이 ‘정치가 계층의 기득권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다면, 그러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공익성과 대표성 조건도 의심할 것이다. 이와 무관하게, 권력을 쫓는 직업 정치가 모두가 사익에만 눈이 어두운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다. 직업 정치가는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사익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행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업 정치가가 영원히 직업 정치가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선거로 당선된 후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직업 정치가들은 의외로 많다.
간접 민주제를 대표하는 정당 민주제의 경우, 각 정당은 다른 정당과는 구분되는 정책 노선이나 이념을 갖고 있다. 그러한 정책 노선이나 이념은 정당의 기능 목적이자, 정당이 시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모아 세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다수의 직업 정치가들은 특정 정책 노선과 이념만 내세워 민중을 선동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기에 바쁘다. 그런 정치가들에게서 구체적 문제를 제시하고 시민들과 함께 해결안을 고민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때 정치가들은 단지 특정 이념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에 불과하며, 계층 간 갈등 중재를 위해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진정한 정치’를 가로 막는 세력이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받아들이면, ‘정치가 계층에 의한 정치’는 민주제에서도 ‘정치가 계층의 기득권화’를 현실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결론이 성립한다. ‘정치가 계층의 기득권화’에 대한 두려움은 인류 역사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상으로 혹은 실제로 위협적인 외부의 적을 이용해 국가나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리는 그러한 두려움이 공론화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더욱이 신분제를 정당화해 주는 세계 이해 방식이 다수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절, 그러한 두려움은 사회적 담론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그러한 두려움이 민중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아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기존 정치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론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자. 그 과정은 세속화 과정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 점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라온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 없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신분제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대에서도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이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실례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200년 이상 지속된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제를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는 시민 계급과 노예 계급이 엄격히 분리된 사회 구조를 갖고 있었다. 여성을 제외하면, 노예 계급의 다수는 이민족이었다. 노예 계층을 생산 기반으로 한 사회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은 서로 단합할 필요가 있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직접 민주제는 그러한 필요성을 충족할 수 있는 여러 정치 체제 중 하나로 받아 들여 져야 한다. 시민 계급의 내부 결속력을 저하시키는 가장 큰 요인으로 특정 가문이나 세력의 정치적 권력화라고 인식한 아테네 사람들이 많았다고 추측해 본다면, 직접 민주제가 그곳에서 채택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추측이 사실인지는 엄밀한 검증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가 계층의 기득권화’에 대한 두려움이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에 대한 이상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법안과 정책을 만드는 아테네 의회는 투표를 통해 선출된 직업 정치가들의 권력 기구가 아니라, 시민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공론화하고 토의에 부칠 수 있는 공공장소와 같은 곳이었다. 법이나 정책을 만드는 별도의 권력 집단은 아테네 사회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아테네 의회는 시민들의 관심사를 표출하기 위한 집회 성격의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회에서 결정된 정책을 시행하는 ‘협의회(council)’도 약 500 여명의 시민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제비뽑기 방식과 유사한 추첨을 통해 선출된 일반 시민들이다. 협의회 소속 시민의 임기는 1년이기 때문에, 협의회는 매년마다 구성된다. 각 시민은 일생 동안 최대 두 번까지 협의회 소속으로 활동할 수 있다. 법을 집행하는 곳은 ‘시민 법정(people’s court)’이다. 시민 법정의 판사들 역시 추첨을 통해 선출된 시민들이다. 위기 때 공동체를 위해 전략을 짜고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장군들만 투표로 선출되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제에 대한 실질적 반론은 그러한 민주제가 대규모 집단의 국가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직접 민주제의 비효율성에 근거한 반론’을 받아들이면,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과 유지가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 그러한 목적이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항상 논란거리로 남게 된다.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이상은 ‘정치가 계층의 기득권화’라는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만으로도 추구 가능한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이상을 지향하는 정치론을 무조건 새로운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한 정치론을 대표하는 직접 민주제는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유럽 중세 시절 북유럽 지역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에도 직접 민주제를 채택한 나라들이 있으며,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의외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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