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Communism)
1.
공산 체제는 일반적으로 집단적 생산 및 결과의 공평한 분배를 통해 유지되는 '계급 없는 사회 상태'를 뜻한다. 이때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소수 직업 정치가들로 구성된 정부 형태가 전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많은 원시 공동체가 그러한 정부 형태 부재의 사회였다는 인류학적 연구에 의해 뒷받침된다. 정치론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정책 수립 및 시장 경제에서의 강한 통제권을 가진 중앙 정당, 즉 공산당을 인정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공산당에 의한 공산 체제를 실현하고 유지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 및 실천 방법을 다루는 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첫째, 계급 구조의 사회에서 피지배자 계층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희망이자 가장 이상적인 정치론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공산주의는 공산 체제를 바탕으로 계급 없는 사회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계급 구조가 특정 지역이 아니라 거의 세계 전체에 확대된 경우, 실례로 강대국들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 하려 했던 경우, 약소국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평등을 보장해 주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론으로 비추어지기도 했다.
둘째, 중앙 통제 세력인 공산당도 각자의 이득을 추구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정당일 뿐이다. 공산당을 견제할 또 다른 정당은 없다. 결국 공산주의는 공산당의 기득권화로 인해 권위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 독재 정부 형태를 인정하는 정치론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때 공산주의 이념은 단지 공산당이라는 독재 정부에 권위를 부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은 첫 번째 평가에 대해서는 환영하지만 두 번째 평가에 대해서는 아니다. 두 번째 평가에 대한 그들의 반박은 그 어떤 정치 체제의 정부도 기득권화될 수밖에 없고, 정부의 권위를 법적으로 보장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표방한 소련이나 동부 유럽 국가들이 붕괴된 사실을 가지고 공산주의를 실패한 정치론으로 몰아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산당이 일당 체제의 독재 정부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실천적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실천적 방안으로 새롭게 재구성된 공산주의 이론만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공산 체제 개념은 동양의 경우 멀리는 노자(老子)에서, 서양의 경우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엿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가상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고대에서 찾고 있으며, 그러한 고대의 공동체는 공산 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대 정치론으로서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K. Marx)와 엥겔스(F. Engels)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산당 선언문(Communist Manifesto)>이 발표된 1848년을 ‘인류사의 혁명적인 해’로 여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고유한 창작물처럼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공산주의도 19세기 중엽 서양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은 다른 정치론과 마찬가지로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의 연장선에 서 있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은 사회의 구조적 분화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18세기 중엽에 촉발되었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에 따르면,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확대되면 될수록 복지도 그에 따라 수반된다.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정치론으로 전통적 자유주의, 전통적 자유주의를 계승한 1970년 대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 등을 들 수 있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에 따르면, 선택의 자유를 무조건 확대시키는 것은 복지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애시 당초부터 차이가 나는 계층 간 격차를 심화시켜 사회의 불균형만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이 하나의 정치론으로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화 과정은 한 두 명의 천재나 사상가로만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하나의 호수에 비유할 때, 그 호수는 여러 경로의 물줄기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 일부를 거론해 보면, 헤겔(G.F. Hegel), 포이어바흐(L. Feuerbach) 등의 철학자들, 오웬(R. Owen), 생시몽(C.H. Saint-Simon), 푸리에(C.H. Fourier) 등 19세기 초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 그리고 메인(H.S. Maine), 피어(J.B. Phear), 러벅(J. Lubbock), 모건(L.H. Morgan) 등의 인류학자들을 들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자 진영으로부터는 변증법을,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로 부터는 사회 개혁 실천 방법으로서의 혁명 개념을, 그리고 인류학자들로부터는 공산 체제의 원시 공동체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특히 정치사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접근할 때, 공산주의는 아나키즘(anarchism), 자유권 중심의 사회주의(libertarian socialism),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사회 민주주의(social democracy), 종교적 사회주의(religious socialism), 조합 공동체주의(syndicalism) 등과 함께 19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 물결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만 감안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여러 이론들이 종합된 방식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한 특징들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유물론적 변증법
유물론적 역사관
과학적 사회주의
3.
변증법은 헤겔 이전까지는 주로 어떤 주장에 함축된 모순적인 것을 찾아내어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아니면 독단을 지적하는 방법을 뜻했다. 논리학과 상보적 관계를 맺어 대화술이나 수사학의 한 분과처럼 여겨진 변증법은 헤겔에 이르러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헤겔에 따르면, 각 사물은 동적인 발달 과정을 밟는 전체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모든 사물에는 상반된 측면이 존재하고, 그러한 상반된 측면이야말로 전체의 통일성을 지향하는 발전의 원천이다. 그러한 발전은 세계 속에 담긴 정신의 구현 과정이자,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파악하는 개인을 산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이러한 헤겔의 사상이 갖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사회 형태의 변형 방식을 일종의 ‘발달 과정’으로 정당화해 주기는 하지만 인간의 실천이 갖는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 그러한 실천은 단지 세계 속에 담긴 정신의 구현 과정에 수반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의 핵심은 단순하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물질적 조건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생산 방식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 방식의 변화 과정은 집단 차원의 의식 수준의 변화 과정을 설명할 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유물론적 변증법을 확대 해석하여 정신이 물질적인 것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정신이 물질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다면, 사회 형태 변동에서 인간의 실천적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마르크스의 애초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다. 물질과 정신의 관계, 그들의 상호 작용에 의한 사회 계층의 형성 등에 관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한 것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그 누구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인식의 한계를 가진 존재일 뿐이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한 마르크스는 ‘세계 발달 과정에 내재한 보편적 원리’와 같은 것을 가정하는 사고방식에 반대한다. 그렇게 가정하는 경우, 인간 의식의 변화와 이에 따른 실천적 활동 모두 단지 그러한 원리의 구현 과정에 수반되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신의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마르크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의식의 변화를 사회 상태의 변화와 결부시켜 논할 때, 그러한 의식의 변화를 오로지 정신의 독립성이라는 논제에 의지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재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 특히 생산 방식에 의존적이다. 집단 차원에서의 의식의 변화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생산 방식의 변화에 따른 노동의 조건들’이다.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 욕구, 즉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욕구와 그러한 노동의 조건들 사이의 극심한 갈등은 집단 차원에서 의식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그러한 의식의 변화는 기존 사회 상태를 바꾸겠다는 욕구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기반이다.
자연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 ‘유물론적 역사관’이란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역사를 고찰하는 입장’을 뜻한다.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른 결론이 반드시 공산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른 공산주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역사의 마지막 단계로 규정한 점이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의 발달 과정은 원시 공산 체제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원시 공산 체제에서는 특정 계층이 지배 계급으로 인식될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가정된다. 하지만 수렵과 농업 기반의 원시 공산 체제는 대규모 집단을 유지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다. 화폐가 개인 간 거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공산 체제 부활을 위한 ‘필요 악’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자본의 축적 정도에 의해 사람이 평가되기 시작하면,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 간 간극은 계급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 모두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의한 희생양이다. 그들 모두 자본에 의해 인간 고유의 본성에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체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계층은 자본가 계층보다는 노동자 계층이다. 계층이 계급으로 기능하는 사회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한 ‘공산주의 혁명’을 주도할 세력도 노동자 계층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른 사회 형태 발달론은 혹시 그럴듯한 시나리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과학적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과학적 측면과 같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반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을 이끈 인물들의 정치 경제론을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한 비판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9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을 이끈 인물들과의 차별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사적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혁명의 이상, 자본의 축적 정도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은 이미 그러한 인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혁명의 실현 가능성, 자본주의의 피폐 등을 정당화해 주는 실증적 자료가 19세기 초에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중엽 이후 사회주의 노선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그러한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이론을 견고화하려 했다.
마르크스 사상의 전개 과정을 공산당 선언문 발표 시점을 기준으로 초기와 후기로 구분할 때, 과학적 사회주의와 관련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 관심사는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및 확산에 따른 부정적 여파에 대한 실증적 고찰이었다. 후기 마르크스의 주 관심사는 국가 개념이 만인을 지배하기 이전의 원시 공동체의 생산 방식과 사회 구조에 대한 실증적 고찰이었다. 특히 그는 사회 진화론의 성격을 띤 인류학의 여러 연구를 분석하면서, 그리고 변화하는 유럽의 정세를 목격하면서 다음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 상태로의 전이는 가능적인가? 아니면 결정론적인가? 공산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은 단선적 경로를 따르는가? 아니면 다양한 경로를 따르는가?
초기 마르크스의 글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 상태로의 전이는 결정론적으로, 그리고 공산주의의 실현 과정은 단선적 경로를 따르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죽음으로 인해 체계화되지 못한 그의 말년 생각을 추적해 보면, 그러한 전이를 가능적으로,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다양한 경로를 따르는 것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이는 다음 두 가지를 고려할 때 설득력을 얻는다.
레닌주의의 출현 과정
원시 공산 체제의 유지와 붕괴 과정
4.
마르크스와 레닌을 동시대 사람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가 죽을 당시 레닌(V. Lenin)은 18세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닌주의는 레닌만의 창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연장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운동 중 하나로 러시아 ‘대중당 운동(Narodnik)’을 들 수 있다. ‘Narodnik’은 ‘대중성’을 뜻하는 러시아 단어이다. ‘러시아 사회 혁명당의 어머니’로 불린 브레시코브스키(C. Breshkovsky), 문학 비평가 미하일로브스키(N.K. Mikhaylovsky) 등 러시아 대중당 인물들은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졌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 상태는 마치 유럽 중세 봉건제와 유사한 지주 대 소작인의 계급 구조 사회 상태였다. 그들은 그런 사회 상태를 공산주의 사회 상태로 바꾸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의 갈등이 계급 갈등으로 작용하는 사회 상태는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산업화된 사회 상태’이다. 그러한 사회 상태의 계급 갈등만이 공산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당시 러시아에는 적용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마르크스 역시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의 여러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논의했다.
레닌주의는 대중당 운동을 이끈 인물들의 고민을 이어 받은 공산주의의 한 이론이다. 레닌에 따르면, 공산 혁명은 자본주의 이전 단계의 사회 상태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식민지에서 공산 혁명이 발생하기 쉽다. 강대국은 자국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고, 그러한 식민지 국가의 잘 조직화된 소수 정예의 공산당은 대중의 지지를 얻어 공산 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의 주도 세력이 반드시 핍박받는 다수의 노동자 계층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노동자 계층의 자각에 의한 자발적 혁명을 논하는 것은 실재와 거리가 멀다. 레닌주의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러한 생각은, 즉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자본주의 사회 상태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농민 등 다양한 피지배자 계층을 포섭하는 방식의 생각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 대중당 운동에서 레닌주의 출현까지의 과정 초반부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의 지식인들과 함께 공산 혁명의 다양한 경로에 대해 고민했다. 특히 그 고민은 여러 인류학자의 연구서에 마르크스가 일일이 단 노트들에 잘 나타나 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자본주의 이전의 원시 공동체의 생산 방식 및 사회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인류학자들의 서적을 탐독했다. 이 사실은 엥겔스의 저술에서 엿볼 수 있다(Engels, F.(1884),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hums und des Staats). 하지만 인류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인류학자들의 글에 그가 일일이 단 노트들을 편집한 것이 나올 무렵에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Marx, K.(1972), The Ethnological Notebooks of Karl Marx, trans. & edit. by L. Krader, Van Gorcum Assen). 1880년에서 1882년까지 마르크스가 관심을 가진 인류학자들로 메인, 피어, 러벅, 모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모건의 연구를 통해 농업이나 수렵 기반의 아시아 및 유럽의 소규모 공동체뿐만 아니라 이로쿼이(Iroquois)족 등 아메리카 인디언 공동체들도 공산 체제로 해석 가능하다는 사실에 마르크스는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마르크스가 모건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평가한 결과이다. 모건은 마르크스와 달리 이로쿼이족의 사회 구조를 집단적 소유 방식이 아니라 개인 간 조화로운 관계를 강조해 설명했다. 이로쿼이족의 인간관계는 모건에게도 인류가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그러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건은 원시 부족에서 개인의 소유권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출현까지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도 혁명과 같은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는 낙관적 입장을 취했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혁명을 통해서만이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집단적 소유 방식의 복권은 원시 공산 체제 사회의 개인들이 누렸던 자유와 평등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말년의 생각에 따르면, 다양한 원시 공산 체제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현 과정도 지역마다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생산 방식의 변화가 모든 지역에 걸쳐 동일할 수 없고, 또 개인의 소유권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가 반드시 모든 지역에서 형성된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모든 원시 공산 체제는 집단적 소유에 바탕을 둔 공산 체제였을까? 정말 원시 공산 체제의 사회는 생산 방식이 바뀌어 개인 소유의 관점이 생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조화롭게 유지되었을까? 이러한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마르크스는 말년에 이르러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전이를 가능적인 것으로 여겼다. 또 공산주의의 실현 과정도 단선적 경로보다는 다양한 경로를 따른다고 여겼다. 첫 번째 결론은 러시아 대중당 운동에서 레닌주의가 출현하는 과정 초반부에 대해 마르크스가 보인 관심, 그리고 두 번째 결론은 원시 공산 체제의 붕괴를 이끈 생산 방식의 지역적 차이 등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해 마르크스가 보인 관심에 의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5.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문>에 나온 방식으로 공산화된 지역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동부 유럽을 포함해 여러 지역에 공산주의가 정착하는 데에는 레닌주의의 영향도 컸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의 지역적 확산 과정에 대해여 ‘마르크스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적절하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특히 1920년 대 동북아시에서 유래한 ‘제 3세계 마르크스주의(third world marxism)’는 강대국의 식민지 팽창 과정에 대항하여 나온 것이다. 제 3세계 마르크스주의를 논할 때, 레닌주의의 영향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이 강대국의 식민지 정책으로 귀결된다는 논리를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3세계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마우쩌둥(Mao Tsetung)은 레닌과 달리 소수 정예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혁명론을 부정했다. 또한 공산 혁명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과정의 완결이 아니라 출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레닌과 마오쩌둥의 이러한 견해 차이를 구체적으로 논하려면, 소련과 중국의 전통 및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쿠바로 눈을 돌리는 경우, 카스토르(F. Castor)가 주도한 혁명이 정말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따른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7월 26일 항쟁은 스페인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 노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토르의 정신적 지주도 마르크스보다는 라틴 혁명 문학가 호세 마르티(J. Marti)였다. 쿠바 혁명 이후 카스토르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실제 이유는 이념적이기보다는 경제적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쿠바는 1980년대까지 소련의 든든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쿠바의 혁명은 ‘자발적 민중 혁명’에 가깝다. 이때 그 ‘민중’은 <공산당 선언문>에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이러한 쿠바 혁명의 사례는 공산 체제의 실현 방식이 반드시 마르크스 엥겔스의 정치론을 전제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하지만 쿠바 혁명 등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정치론이 갖는 약점을 지적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 공산 체제 도래를 위해 혁명을 주도한 모든 인물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실천의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역별로 차이를 보이는 공산주의의 실현 방식은 마르크스주의로 국한된 공산주의의 이해 방식을 넓혀 주는 데 도움을 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 자신도 공산주의 실현 방식의 지역적 차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고민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산당이 기득권화되지 않도록 해 주는 실천적 방안이다. 그러한 방안에 대한 구체적 고민 없이 현 경제 위기를 빌미로 ‘지금 우리에게 마르크스가 필요하다’는 식의 선동은 폭 넓은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공산 혁명 이후 공산당이 권위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 양상의 독재 정부로 기능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추앙하는 누군가가 그런 사실을 그저 특정 인물의 불순한 동기 탓으로 돌린다면, 그는 마르크스를 전면에 내세워 무엇인가를 주장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죽기 전까지 유럽과는 다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다룬 책들을 탐독했다. 그가 그러한 책들을 탐독한 이유는 이 짧은 글을 정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 읽어 볼 것들
Horowitz, I.L.(1972), Cuban Communism, Transaction Books.
Meyer, A.G.(1984), Communism, Random House.
Vallenier, E.K.(1983), The Soviet Union and the Third World, Prentice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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