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1.
우리말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는 ‘공감을 바탕으로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함’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상적이고 심리적 의미에서의 사해동포주의를 서양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 세계시민주의는 그 정의 방식의 다양함과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보편적 이념이나 체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주목받고 있는 ‘문화적 측면의 세계시민주의’는 그러한 보편적 이념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세계시민주의는 어떤 보편적 이념이나 체제를 전제한 ‘도덕적 측면의 세계시민주의’, ‘정치적 측면의 세계시민주의’, ‘경제적 측면의 세계시민주의’와 어울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문화적 측면의 세계시민주의가 추구하는 다양성은 다른 측면의 세계시민주의가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획일화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이를 서양 세계시민주의 논쟁에 내재적인 문제로 규정할 때, 그 해결 방식은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지금까지의 접근 방식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이 짧은 글에서 논증하기란 쉽지 않다. 이 글에서는 세계시민주의의 정의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그 접근법에 대해 생각해 보는 젓을 자극해 보려 한다.
2.
‘세계시민주의’로 번역한 ‘cosmopolitanism’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kosmopolite’에 두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가 도시 국가의 시민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지역의 시민이 되려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그 어원 속에 담겨 있다. 이때 세계시민주의의 정의 방식은 다음 그림에서 암시하듯 ‘외부 확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시민주의의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은 이념 및 체제에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전제한다. 이때 특정 중심의 이념이나 체제는 모든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특정 중심은 반드시 한 국가처럼 지역적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유럽 공동체처럼 국가들의 연합체를 뜻할 수 있고, 특정 이념이나 체제 자체를 뜻할 수 있다.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는 결국 보편적으로 가정된 특정 이념이나 체제의 세계화를 지향하며, ‘세계시민’은 자신이 속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서 그러한 이념이나 체제에 동조하고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한 이념이나 체제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신성분과 상관없이 세계시민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civitas dei)’에서 엿볼 수 있다.
신의 도시는 전지전능한 창조주로서 유일신의 섭리를 따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도시이다. 신의 도시는 그러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때 신의 도시가 추구하는 종교적 이념은 인류가 지향해야 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시민주의는 그 자신이 인정했듯이 정치적, 종교적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된 어떤 이념이나 체제는 이론적으로는 특정 시대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 모두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특정 시대나 지역의 가치 체계로 기능하거나 그런 시대나 지역 인물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게 마련이다. 보편성의 이러한 이상적 탈중심성과 실제적 중심성이라는 이중적 성격 때문에, 어떤 보편적 이념이나 체제를 지향하는 세계시민주의의 정의 방식은 외부 확장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은 이념 및 체제에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는 지역 간 정치적, 종교적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변에 속하는 지역 사람들은 중심을 일종의 상위 계급처럼 인식해 중심의 이념이나 체제를 주변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여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정리한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신의 도시’가 추구하는 이념은 모든 종교에 깔려 있다는 정당화 논리가 강조되곤 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세계정부’와 같은 초국가적 정부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명백히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조직의 인정 여부에 따라 세계시민주의를 소극적 의미와 적극적 의미로 분류하는 관례를 따르는 경우, 아우구스티누스는 적극적 의미에서 세계시민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세계시민주의는 18세기 말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회자되는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는 세계 평화를 위해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국가들의 리그(league of nations)’가 결성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국가들의 리그가 초국가적 세계정부나 국가 연합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들의 리그는 세계정부의 이상에 대한 개념적 씨앗이 되며,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조직되기도 했다. 이 점에서 세계정부의 이상을 칸트와 연관짓는 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칸트의 세계시민주의를 정치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세계정부는 어디까지나 그에게 도덕적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 도덕적 목적이란 누구나 그 스스로 자치권을 가지는 공화국의 세계화이다. 이때 그 ‘누구’는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도덕적 준칙을 전제한 합리적 개인’이다. ‘이성의 왕국(kingdom of reason)’으로 종종 상징되는 이러한 입장은 그의 세계정부의 이상과 갈등 관계를 맺을 여지를 남긴다. 그 입장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는 반면, 세계정부는 ‘이성의 왕국’을 세계화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세계정부의 역할에 대래 최소한의 도덕적 제약을 가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국가들의 리그나 연합체는 다른 지역에 군사적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국가 간 현실적 관계를 고려할 때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한 공상에 깔려 있는 칸트의 세계시민주의는 모든 합리적 개인들이 ‘단 하나의 도덕적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의 세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외부 확장적이다. ‘단 하나의 도덕적 공동체’의 가치체계는 모든 인류가 받아들여야 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근대 세계시민주의의 또 다른 유형은 종종 칸트와 대비되어 다루어지는 공리주의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벤담은 이성보다는 고통 회피라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보편화하여 도덕적 차원에서 세계시민주의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칸트와 벤담의 이러한 입장 차이를 의무론 대 결과론의 교과서적 소개에 따른 대립 구도 속에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두 입장은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을 통해 서양 자유주의 전통의 여러 입장을 생성시킨 원동력과 같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의 여러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옹호론이 18세기 ‘경제적 측면의 세계시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장은 개인 간 자유로운 거래를 촉진시키며, 자유무역 확대에 의한 시장의 세계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18세기 아담 스미스나 디트리히 헤르만 헤게비쉬(D.H. Hegewisch)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현대 자유주의의 여러 입장은 이러한 18세기 세계시민주의의 도덕적, 경제적 측면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자유주의 정치론 내에서 현재 세계화에 대한 반응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법적 범위 설정, 정부의 시장 개입 여부 정도에 따라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입장 차이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현재 세계화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평가로 엇갈리지만, 세계화에 대한 극단적 반대론은 없다는 것이 자유주의 진영의 대세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전통 내의 여러 입장들의 경쟁 관계를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의 맥락에서 고려할 때, 그것은 약자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지배권을 잡으려는 주도권 싸움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선택의 자유, 기회 균등 등의 원리를 공유하지만, 그 설정 범위를 놓고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각 입장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약자의 관점에서는 세계를 그 입장에 따라 동질화시키려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과 관련해 보편성을 추구하는 입장들의 경쟁 관계가 약자의 관점에서 주도권 싸움으로 비추어지는 경우는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극명하게 나타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족주의와 대립한 19세기 세계시민주의의 흐름을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반영한다고 간주하고 비판했다. 전통적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그러한 자본주의의 확대는 개인의 자유와 상호 이익 증진을 빌미로 ‘부르주아 지배권의 세계화’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유 시장 확대에 따른 경제적 세계화의 부작용은 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범세계적 유대 의식을 강화시킬 것이며, 그러한 유대 의식을 바탕으로 한 공산 혁명은 한 지역에 그치지 않는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세계화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적 평가는 결국 계급이 사라지고 공산화된 세계의 도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과 같다. 그러한 세계를 실현하는 것을 꿈꾸고 실천하는 모든 사람은 그가 속한 지역이나 문화와 무관하게 공산주의의 세계시민이다. 이는 자유주의의 물결과는 다른 측면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세계시민주의 사상을 보여준다.
공산주의 옹호자들 중에는 세계시민주의를 경멸한 인물들도 있었다. 실례로 레닌과 스탈린을 들 수 있다. 역시 자유주의 옹호자들 중에도 세계시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인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세계시민주의를 논할 때,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옹호자들 대다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특정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때 각 진영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의 보편성 때문에, 두 진영의 갈등은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과 관련하여 약자에게는 세계라는 무대를 놓고 벌어지는 주도권 싸움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러한 주도권 싸움을 대표하는 것은 식민지주의(colonialism)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엽까지 전 세계를 뒤흔든 서양 식민지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찰스 밀스(C. Mills), 캐롤 페잇맨(C. Pateman)과 같은 서양 학자나 한때 강대국 식민지였던 지역 출신의 프란츠 파농(F. Fanon), 에드워드 사이드(E. Said) 등은 근대 식민주의의 기원을 15세기 혹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잡는다.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면서 사회 문화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식민주의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사양의 시대정신처럼 기능했었다. 서양의 세계시민주의가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점은 특히 서양 자유주의에 매료된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세계시민주의가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것으로 볼 여지가 있음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에 대해 무지하다. 아니 그러한 것을 인식하더라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념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칸트적 의미에서 사회 개선을 위한 ‘조율적 기능(regulative function)’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로부터 이념의 실현 방식에 대한 수용 여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수용 여부가 약자의 관점에서 고려될 때 더욱 그렇다.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가 논리적으로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세계시민주의는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세계시민주의의 어두운 면’에 함축된 이 점은 적어도 한때 강대국의 식민지였던 지역의 사람들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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