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계시민주의 3

착한왕 이상하 2014. 10. 20. 00:05

 

3.

세계시민주의의 또 다른 정의 방식은 탈중심적 정의 방식이다. 보게 되듯이, 탈중심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의 모든 형태가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와 대립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보편성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그 두 정의 방식의 설정도 달라진다. 이 점은 세계시민주의의 탈중심적 규정 방식을 먼저 살펴보는 것보다, 특정 사례 분석을 통해 이끌어낼 때 분명해진다. 그러한 사례로 일관성 없어 보이는 볼테르의 정치적 글들을 들 수 있다.

 

볼테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을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사람들은 볼테르를 혁명의 정신적 지주로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가 시민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볼테르는 군주제를 공화제에 대비시켜 비판한 몽테스키외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볼테르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군주의 독제가 군주제 자체보다는 군주의 인품에서 기인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1776년 루이 15세가 자신이 국가 권력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선언했을 때, 볼테르는 당시 지식인들의 경악스러운 반응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선언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볼테르가 군주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간주했던 것은 아니다. 실례로 1726년 영국 망명 시절 친구 티에리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테르는 공화제에 동조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볼테르가 그러한 입장을 밝힌 문헌은 그 편지 딱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 군주제를 공화제에 대비시켜 비판하는 볼테르의 문헌은 없다. 더욱이 그를 대표하는 소설 <깡디드>에 나타난 이상적인 사회 엘도라도는 군주제 통치 사회이다. 그곳은 군주가 통치하는 곳이지만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공화제 통치 지역보다 더 잘 보장되어 있는 사회이다. 그 누구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 볼테르가 당시 다른 계몽주의자들과 달리 이상적인 사회를 마치 철학자 왕이 등장하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처럼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볼테르가 당시 프랑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입헌 군주제를 채택한 영국을 롤모델로 삼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영국 사회가 프랑스보다 개인의 자유와 개인 간 거래가 더 잘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 간 거래와 관련해 볼테르는 아담 스미스의 사상을 수용해 지폐 중심의 프랑스 화폐 개혁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개인의 선택 및 자유와 관련해 당시 낙관적 관점에서 사회 계약론을 주장한 인물들의 사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심지어 자국의 루소마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볼테르가 원시 시대의 자연 상태에 대한 비관적 가정을 사회 계약의 기원으로 삼은 홉스에 동조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악(善惡)과 무관하게 자연적 본성으로 가정된 이기적 성향이 조화로운 사회 상태를 저해할 수 있는 현실적 제약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홉스에 동조했다. 볼테르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과 협동의 관계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주의자들로부터 자유를 보편적 권리로 가정하는 사고방식을 수용하면서도 , 이상주의자들이 애써 무시하려 드는 현실적 제약들을 과감 없이 받아 들였다. 그 결과 볼테르는 사회를 단순히 합리적 개인 간 계약의 산물로 보지 않았으며, 동시대 일부 계몽주의자들이 혐오한 전통이라는 것도 무시하지 않았다.

 

볼테르가 자유를 논할 때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은 이다. 개인의 자유는 오로지 법이라는 틀 안에서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은 근대 철학에 등장하는 합리적 개인들 사이의 합의에 의한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기능하는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볼테르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이상적인 별도의 정치가 있다는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다수의 합의와 참여를 권장하는 공화제가 실제적으로는 소수의 독재로 귀결될 수 있다. 정치라는 것이 소수의 직업 정치가 집단에 의해 진행된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민주(民主)를 외치는 정치가들도 이기적 성향을 가진 개인들일 뿐이다. 그들이 오히려 민주를 방해하는 집단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군주제를 공화제로 대체한다고 개인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는 법 제도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법은 볼테르에게는 단순히 어떤 정치 체제의 논리적 결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의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깡디드>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마치 철학자 왕이 등장하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처럼 묘사한 볼테르의 의도는 다수의 무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공포, 자기중심적 성향, 무비판적 시각 등을 무시한 채 특정 정치 체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을 조롱하려는 것일 수 있다.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본 볼테르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줄타기를 바탕으로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의 여러 입장을 이끌어내 보자.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볼테르에 대한 절름발이 해석에 근거한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의 규정 방식이다. 여기서 볼테르에 대한 절름발이 해석이란 군주제를 공화제로 대체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본 인물로 볼테르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볼테르가 당시 영국을 프랑스 개혁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사실과 연관시켜 보자.

 

당시 영국은 프랑스처럼 군주제였지만 의회와의 권력 분산으로 인해 군주의 절대적 독재는 불가능했다. 당시 영국 사회는 프랑스보다는 공화제에 가까운 사회였다.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보다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그리고 시장 경제의 활성화로 좀 더 많은 부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개인의 자유는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권리로서 만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프랑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만인이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속한 지역과 상관없이 세계시민이다.

 

위 해석에 따르면, 프랑스에 대한 민족적 자긍심 유무와 무관하게 볼테르는 보편적인 것을 찾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 어느 정도 실현되어 있다면, 자신이 속한 지역은 그곳과 유사해져야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위 해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는 외부 수용적이다. 또한 보편적이라고 확신한 것에 따른 특정 정치 및 경제 체제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세계로 확산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념적이다. 이때 이념적이라는 것보편적인 어떤 것만을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그것과 다른 것을 부정하는 사고방식을 뜻한다. 따라서 위 해석에서 이념적이고 외부 수용적인 방식의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세계시민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자신이 속한 특정 지역의 고유한 것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것을 기준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보편적인 것이 다른 지역에 좀 더 실현되어 있다면, 그 지역을 모방하려는 태도는 결코 사대주의(事大主義)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모방하려는 것은 만인이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것을 확산시키기 위한 정당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세계시민주의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그들이 속한 지역과 무관하게 보편적인 것이 좀 더 많은 지역에 확산되도록 해주는 정당한 수단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를 동전의 한 면에 비유할 때, 이념적이고 외부 수용적인 방식의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는 그 동전의 다른 면과 같다. 이념적이고 외부 수용적인 세계시민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약 자신이 속한 지역의 가치 체계가 보편적인 것에 더 가깝거나, 더 가까워졌다면, 그는 그 가치체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자신을 다른 지역에 투영시키는 능력일 뿐이다. 그러한 그에게 세계시민주의는 자신이 속한 지역을 기준으로는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것이지만, 다른 지역을 기준으로는 탈중심적 정의 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 점은 외부 확정적 정의 방식에서 중심이 반드시 지리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 정의 방식에서 특정 중심은 국가들의 연합체를 뜻할 수 있고, 특정 이념이나 체제 자체를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와 이념적이고 외부 수용적인 방식의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의 대칭적 관계는 세계시민주의의 학적 논쟁에 자주 등장하는 탈지방적 혹은 맥락 의존성이 약한 세계시민주의(thin cosmopolitanism)와 맥락 의존성이 강한 혹은 지방적 세계시민주의(vernacular cosmopolitanism)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탈지방적 세계시민주의는 지역적 결속에서의 탈피 혹은 지역적인 것과의 거리두기를 우선시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지방적 세계시민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 지역적 고유성과의 동조 가능성을 강조한다. 실제 현실이 탈지방적, 지방적 세계시민주의로 딱히 양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세계화와 지역적 집착이 항상 공존하고 상호작용한다는 세방화된 세계시민주의(glocalized cosmopolitanism)’를 주장한다. 이민 정책 등을 놓고 이들이 각자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 하려 해도, 그 차이는 어떤 보편적인 것을 가정하는 경우 사소해진다.

 

세계시민으로 자처하는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만 하는 어떤 보편적인 것 U가 있다고 하자. U가 좀 더 실현된 지역 L에 속하지 않은 세계시민주의 옹호자들 중에서 자기 지역 고유의 것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일수록 탈지방적 세계시민주의 옹호자에 가깝다. 자기 지역 고유의 것을 U에 따라 변화시켜 보려는 사람은 세방화된 세계시민주의 옹호자에 가깝다. 자기 지역 고유의 것에 이미 U의 개념적 씨앗이 담겨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지방적 세계시민주의 옹호자에 가깝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U의 가정 아래서는 이념적이고 외부 수용적인 방식의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 옹호자로 분류 가능하다. 만약 세계시민으로 자처하는 어느 사람이 U가 좀 더 실현된 L에 속해 있고 U의 세계화를 바란다면, 그는 지방적 세계시민주의 옹호자이자 동시에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에 따른 세계시민주의 옹호자로 분류 가능하다. 탈지방적, 지방적 그리고 세방화된 것으로 세계시민주의를 분류하는 것이 세계화 등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서 유용하더라도, U의 가정 아래 그러한 분류법에 따른 입장 차이는 사소해진다. 외부 확장적 정의 방식의 세계시민주의와 이념적이고 외부 수용적인 방식의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가 사실은 동전의 양 면과 같다면, 이는 탈지방적, 지방적, 세방화된 세계시민주의에 대해서도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볼테르가 이념적이고 외부 수용적인 방식의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를 옹호했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볼테르에 대한 절름발이 해석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따라서 볼테르가 받아들일 세계시민주의는 그러한 세계시민주의가 아닐 것이다. 볼테르가 받아들일 만한 세계시민주의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방식의 탈중심적 세계시민주의를 이끌어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