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세속화와 근대화 3. 산업화

착한왕 이상하 2014. 11. 18. 00:07

현대 사회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국민 국가(nation-state)’의 성격을 띤다.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영토를 보장하기 위해 통일성을 갖춘 법과 정부를 바탕으로 한 국가는 필요하다. 그러한 국가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지 않더라도 국민의 자격을 가지며, 국민들로 구성된 국가는 독립적인 주권을 갖는다. 이러한 국민 국가의 경계가 해당 사회의 내적 특징들에 의해 얼마나 충분히 결정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세계화의 평가 방식과 맞물린 그러한 논쟁은 이 작업의 주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전히 우리가 사회와 국민 국가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현실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근대화의 세 가지 성향들은 국민 국가 형성 과정을 근대화로 규정하는 방식에서 주로 논의된 것들이다. 문제는 그러한 규정 방식을 이 땅에 바로 적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땅의 시각을 그러한 규정 방식에 섞는 경우, 근대화의 세 가지 성향 모두 식민지주의(colonialism)’라는 접점을 갖게 된다. 이 점은 특히 산업화’,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이라는 성향을 분석하는 가운데 분명해지며, ‘인종주의의 쇠퇴라는 성향은 서양에 국한된 시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식민지였던 땅들의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산업화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은 유럽 혹은 서양 중심의 근대화 서술 방식만으로도 어느 정도 분석 가능할지라도, ‘인종주의의 쇠퇴는 세계사적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현재 정치 체제들은 19세기 중엽 이후 정치를 통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행해진 다양한 정치적 실험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험 중 특정 정치 체제가 세계 전역으로 확대된 데에는 서양의 식민지 팽창 과정이 있었다. 근대화의 중요 성향으로 산업화를 논할 때, 식민지 팽창 과정이 언급되는 이유는 그 과정이 서양 국가들의 산업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화의 주요 성향으로 산업화를 거론하는 서양 학자들은 식민지 팽창 과정보다는 서로 대립되어 보이는 현재 정치 체제들이 지역적으로 정착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왜 그런지 간략히 살펴보자.

 

서양의 산업화는 과학과 결합한 기술의 진보 없이는 불가능했다. 사실 기술력만 가지고 산업화가 가능했더라면, 중국이 18세기 중엽 이후 경제적 측면에서 유럽에게 자리를 내준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기술의 진보는 국가 간 경쟁 논리, 식민지주의, 권력 분포의 재배열 등과 관련해 평등사상과 긴장 관계를 맺게 된다. 군주제나 군주를 중심으로 한 귀족 계층이 붕괴 직면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시장 및 정치 체제의 변화를 중심축으로 새로운 기득권 계층의 형성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평등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기술 진보와 평등 사이의 갈등 요소, 근대의 긴장으로 종종 묘사되는 것을 극복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산업화 과정이며, 그 과정이 근대화의 핵심이다.

 

근대화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위와 같은 규정 방식은 20세기 중엽 이후 레몽 아롱(R. Aron), 베링턴 무어(B. Moore) 등에 의해 구체화되었지만, 멀리는 토크빌(A. d. Tocqueville)의 문헌에도 반영되어 있다. 근대화의 핵심 성향으로 산업화를 규정할 때, 산업화는 단순히 기계화에 바탕을 둔 생산 방식의 구조적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 성장 및 이에 따른 평균적 부의 축적 과정까지 포함한다. 위와 같은 근대화의 규정 방식에 따르면, 다양한 정치 체제의 집단이 국민 국가의 사회 형태를 띠게 된 데에는 산업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 이념적으로 대립되어 보이는 정치 체제의 집단들 모두 산업화를 바탕으로 국민 국가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각 집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산업화의 진행 방식은 다르다. 그러한 진행 방식에 따라 근대의 긴장감은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양극 정치 체제 국제 질서로 변통되었으며, 이후 경제 위기 및 복지 문제 등과 관련하여 여러 정치적 실험의 요소들이 각 체제에 스며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산업화의 특징은 이 땅에 직접적으로 해당하지 않는다. 식민지 팽창을 주도한 서양의 국가들과 달리, 이 땅의 산업화 과정은 자생적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산업화에 필요한 철도, 항만 등 기반 시설 및 초기 인적 자원이 일제 강점기라는 불행한 시기에 마련되었다고 인정하는 경우, 이 땅의 산업화의 출발 시점도 그 시기로 잡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 땅의 근대화를 논할 때 그 시기에 대한 평가 방식이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근대화의 다른 성향들을 살펴 본 후에 다룰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화는 근대화의 다른 성향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을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잡을 때, 이것은 필연적이거나 상부 주도적 의미가 아니라 잠정적이고 민중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 마치 근대화의 필연적 기반이었다든가, 혹은 소수 엘리트층에 의해 경제 성장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식의 일제 강점기와 경제 성장기의 관계에 대한 필연적이거나 상부 주도적 의미의 해석 방식은 역사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지를 경험한 모든 국가가 경제 성장을 수반한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더욱이 그런 해석 방식은 서양근대성(modernity)’으로 설정하고, ‘서양이 아닌 곳이 서양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근대화에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근대화가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할 때, 그 사건은 전통과 새로운 것의 갈등, 결합, 상호 작용 및 제한에 의한 지역 역사들의 다발체이다. 이 점 역시 근대화의 다른 성향들을 살펴본 후에 분명해질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경제 성장기의 관계에 대한 잠정적이고 민중적 해석은 전자가 반드시 후자의 필연적 기반이라거나, 혹은 소수 엘리트층에 의해 전자가 후자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식의 해석 방식을 부정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의 착취 목적으로 형성된 기반 시설 및 인적 자원이 해방 후 경제 성장기에 대한 결정적 요인이라고 할 수 없다. 경제 성장기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일본으로부터 계승한 것이 아니며, 일제 강점기 시대에 형성된 기반 시설이 이후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충분했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일제 강점기 시절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특정 인물이나 인물들이 경제 성장을 수반한 산업화를 주도했다는 식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은 단지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반영해줄 뿐이다. 그러한 역사관은 결과를 생성시킨 과정에 참여한 다수를 사소한 것으로 잘라 내어버리는 절름발이 관점일 뿐이다.

 

서양 근대화의 산업화가 갖는 특징과 달리, 이 땅의 산업화는 기술 진보와 평등 사이의 근대의 긴장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 성장을 가속화시킨 해방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그러한 긴장감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점은 이 땅을 분단 이후의 남쪽에 국한시킬 때 성립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자유 민주주의의공산주의의 정치 체제가 도입된 과정이 산업화와 직접적 연관성을 맺는다고 보기 힘들다. 다만 그 체제가 분단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 산업화가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 적응 과정은 미소 냉전 체제의 대리전쟁의 맥락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자유반공으로, ‘공산주의반미로 각색시켰으며, 이러한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서양의 근대의 긴장감은 19세기 중엽에 이미 나타났고, 민주주의, 사회주의, 무국가주의 등 정치적 실험을 자극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한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과정은 특정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라는 사회 상태가 형성되고 굳어지는 과정과 중첩된다. 반면에 이 땅의 산업화는 특정 정치 체제를 고착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으며, 산업화 과정에서 부와 정치적 권력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았다. 특히 이 땅의 산업화 과정에는 스탈린 방식의 계획 경제를 방불케 하는 정책을 채택한 독재 세력의 개입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땅의 근대화를 논할 때, 다음의 물음은 항상 쟁점이 되었다.

 

독재는 이 땅의 경제 발전에 반드시 필요했는가?

 

위 물음에 부정하기 위해 어떤 이는 단기 간 계획 경제에 의한 성장이 결국 장기적으로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자료 분석에 근거해 제시한다. 또 어떤 이는 독재가 없었다면 좀 더 경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논한다. 이에 맞서 독재 시절 경제 성장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러한 사실로부터 경제 성장에 독재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당위성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따라서 위 물음에 대한 부정론이 독재 시절에 경제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무효화할 수는 없어도, 그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위 물음에 대한 긍정론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독재가 개입한 경제 성장은 정계와 재계, 교육계, 언론계의 유착 현상을 낳았다. 그러한 유착 현상과 더불어 경제 성장에 의한 평균적 부의 증가는 이 땅의 산업화 과정에서 분출된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결과 급속한 경제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야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 분배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해 보면, 이 땅의 산업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 땅의 산업화의 특징>

(A1) 식민지 팽창을 주도한 서양 국가들과 달리, 이 땅의 산업화는 자생적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을 이 땅의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일제 강점기와 경제 성장기의 관계는 필연적이거나 상부 주도적 의미가 아니라 잠정적이고 민중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A2) 서양의 경우와 달리, 이 땅의 산업화는 기술 진보와 평등 사이의 근대적 긴장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 성장을 가속화시킨 해방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그러한 긴장감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부와 정치적 권력의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인식이다.

 

(A3) 경제 성장을 수반한 이 땅의 산업화 과정에는 독재가 개입되어 있다. 정계와 재계, 교육계, 언론계의 유착과 더불어 경제 성장에 의한 평균적 부의 증가는 이 땅의 산업화 과정에서 분출된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인식이 사회적 실천 운동으로 표출되는 것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