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세속화와 근대화 5.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착한왕 이상하 2014. 12. 29. 19:55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논했다. 그 곳에서 기득권층을 형식적 기득권층과 실질적 기득권층으로 나누었다.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을 근대화와 맞물려 평가할 때, ‘여기저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의 소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란 실질적 기득권층이 동시에 형식적 기득권층으로 보장받는 집단을 뜻한다. 실질적 기득권층과 형식적 기득권층의 규정 방식을 고려할 때,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 소멸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기득권층이 먼저 붕괴되어야 한다. 하지만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의 소멸이 실질적 기득권층의 소멸까지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분명히 하는 것은 계층 간 갈등이 소수 대 다수의 계급 갈등으로 번질 수 있게 되는 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근대화를 기준으로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할 때, 전근대적 사회는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 지배한 상태였다. 특정 신분 계층은 형식적 의미에서 상위 계급으로 보장되었고, 그 계층은 민중을 자신의 뜻에 따라 강제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행위하도록 해주는 재화 및 권력을 쥔 실질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층이기도 했다.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 지배한 전근대적 사회가 하루아침에 근대적 사회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신분제가 약화되고, 결국 폐지되어야 한다. 직업군의 수적 증가에 따른 계층 분화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형식적 기득권층의 붕괴에 대한 사회적 기반으로 여겨진다. 다양한 계층의 요구가 특정 상위 계급의 통제 영역 범위로 벗어나게 되면, 사회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상위 계급의 인식 전환이 아니라 그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분제는 폐지된 것이다.

 

신분제의 폐지는 형식적 기득권층을 제도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러나 신분제 폐지에 의한 형식적 기득권층의 사장은 제도적 차원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실질적 기득권층의 사장까지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화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지역에서나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과거 기득권의 영향력은 상당 기간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교육 수준, 판단 방식 및 재원 등이 동질화될 수 없을뿐더러, 지금 거론되고 있는 근대화의 특징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잠재적으로 만인에게 열려 있더라도, 소수 정치가 집단에 의해 진행되는 정치 영역은 다수에게 장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러한 영역이 실질적 기득권층에 의해 잠식당하면 당할수록,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은 소수 대 다수의 계급 갈등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이에 대한 실례로 산업 혁명 후 영국의 계급 갈등 양상을 들 수 있다. 신분제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과거 귀족 및 종교 계층의 집단이 정치 영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반발이 뒤따랐다.

 

산업화가 먼저 이루어진 서양 지역에 국한해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을 고려할 때, 국민 국가 개념은 산업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소수 대 다수의 갈등, 실례로 제도로 다수의 행동을 조율하려는 위로부터의 압력과 소수 기득권층에 대한 아래로 부터의 저항사이의 갈등, 소수 자본가 계층과 다수 노동자 계층의 갈등 등을 해소하기 위해 민족 국가 개념 및 정치 지리학적 국가 개념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국민 국가 개념의 정착 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국가 내부뿐만 아니라 국가 간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국민 국가 개념의 정착 과정은 이 작업의 핵심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실제 갈등 양상은 앞서 언급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다수를 조작하려는 소수의 선동에 맞선 또 다른 비판적 소수의 존재는 소수 대 소수의 갈등 양상뿐만 아니라 비판적 소수 대 무비판적인 다수의 갈등 양상도 포함한다. 또한 투쟁의 목적과 방향성을 둘러싼 다수와 다수의 갈등 양상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질적 기득권층이 분포된 계층은 여전히 다수에게 상위 계급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다양한 갈등 양상이 나타났다. 그러한 갈등 양상은 정도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사실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다수가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은 신분제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국민 국가는 그러한 요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한 집단적 적응 형태 중 하나이며, 집단 간 관계에서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집단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형태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국격() 혹은 국위(國威)라는 것이 국민 국가 유지에 필요한 이념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이념적 작동에 대한 가장 부정적인 평가는 소수 기득권층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한 결과로 국민 국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실례로 직업 정치가들에 의한 정치가 지속되는 한, 정부 형태는 결국 과두 정치 형태를 띨 수 없다는 입장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지나친 것으로 받아들이더라도, 계층이 절대 계급으로 인식되지 않는 사회 상태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한 사회 상태를 근대화의 지향점으로 삼는 경우, 근대화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결론은 근대화를 산업화 성향과 관련해 접근할 때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근대화를 산업화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근대화는 어느 정도 종결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산업화를 이끈 기술 체계가 상당 부분 변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 이후 정보화 기술의 도래와 함께 기술의 산업 구조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마저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화를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근대화는 아직 종결된 것으로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현재 국제 사회의 주도적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계층들의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지만, 현재 민주주의 사회 상태가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보화 기술 발달에 따른 계층 분화는 단순히 계층 분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 간 정보 관계망을 기반으로 한 계층 간 거래의 활성화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층 간 거래를 정보화 기술과 연관지어 평가하는 사람들은 현재를 탈근대화 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계층 분화가 계층 간 거래의 활성화도 수반할 수 있다는 점은 과거에도 해당한다. 이는 비록 식자층에 국한되기는 했어도 다양한 토론 모임들이 지금보다는 오히려 19세기 중엽 이후 영국 등에서 더 활성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현재를 탈근대화 시대로 규정하는 방식이 충분한 설득력을 얻으려면, 근대화의 산물로 여겨지는 국민 국가 형태도 급속한 변화의 조짐을 보여야 마땅하다. 그러한 조짐이 현재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 장담하기는 시기상조이다. 국민 국가 개념은 국격이라는 상징성과 애국심에 힘입어 여전히 탄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 국가 개념이 물질적 변화에 맞추어 적응될 가능성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 국민 혹은 시민으로 보장받는다는 법적, 제도적 측면만 가지고 국민 국가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사회의 실제 상태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 지역 내 특징들뿐만 아니라 지역 간 힘의 균형 관계를 고려하여 국가 기능을 다룰 때, 국민 국가에 대한 단일적이고 완벽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만 국민 국가를 논할 때, 국민 혹은 시민이 속하게 되는 계층은 계급으로 인식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반국가적 성향을 띠지 않는 개인에게 계급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정치 이론들이 이미 근대화 초기에 주장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계층 이동에 따른 권력 이동이라는 근대화의 성향이 도달해야 할 종착지는 형식적 의미가 아니라 실질적 의미에서 모두가 시민으로 보장받는 사회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회 상태가 완전히 실현 불가능할지라도, 특정 계층이 다수에 의해 상위 계급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근대화를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근대화는 아직 종결된 것으로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이 점은 여기저기모두에 공통된 것이다. 하지만 특정 계층이 다수에게 상위 계급으로 인식되는 정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이 땅은 산업화에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특정 계층이 다수에게 상위 계층으로 인식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지역이 인접한 이웃 지역의 식민지가 된 사례는 식민지주의 시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식민지가 된 이 땅의 권력 이동 방식은 다른 지역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신분제가 붕괴되고 국민 국가의 틀이 완성되었다는 주장은 당시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신분제 붕괴 조짐은 구한말 여러 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 강점기 시절 이전에 이미 강하게 나타났었다. 그러한 신분제 붕괴 조짐은 일제 강점기 동안 가속화되었을까? 아니면 약화되었을까? 이 땅의 민중 다수가 일본에 대해 갖고 있던 반감은 양반 및 지주 계층에 대한 반감보다 더 컸음을 고려한다면, 이 땅의 민중이 일본을 구세주로 여겼을 리 만무하다. , 중앙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 향촌의 양반 및 지주 계층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구세주로 여겼을 리 만무하다. 일제는 지역 유지들인 양반 및 지주 계층과 결탁하여 민중을 통제하려 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는 과거 신분제 전통을 오히려 지속시킨 시기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두 가지 점에서 강화될 수 있다.

 

첫째, 서양의 간접적 식민지 정책과 달리 일제는 이 땅을 자국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직접적 식민지 정책을 펼쳤다. 심지어 이 땅의 민족정신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에서 실패한 기독교 선교 활동을 이 땅에서 역이용하려 들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일제가 이 땅을 자국에 융합시키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을 잘 보여 준다. 서양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간접적 식민지 정책을 펼친 대신 문화적 융합을 위해 기독교 선교 활동을 강화했으며, 이 때문에 식민지 지역에서는 고유의 종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이 문화 전쟁이라 불릴 만큼 극심하게 나타났다. 이 땅의 경우, 일제 강점기 시절 종교를 둘러싼 그러한 문화 전쟁은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땅의 독립 운동은 그러한 문화 전쟁을 수반하기보다는 공동의 적 일제에 대항한 민족 자결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정치 체제와 관련된 이념 갈등을 유보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그러한 이념 갈등은 해방 이후 표면화되었다.

 

둘째, 서양의 간접적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식민지 국가의 계급 갈등은 자국 내의 소수 기득권층 대 다수 민중의 직접적 대립 양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더욱 강압적인 일제의 직접적 식민지 정책이 펼쳐진 이 땅의 경우, 이 땅의 기존 기득권층 대 다수 민중의 대립 양상의 정도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 시절 발생한 민란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대부분 일본인과 기존 양반 출신들로 구성된 지주층에 대항한 생존권 싸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제라는 강압적인 제 3자의 통제로 인해 소수 대 다수의 대립 양상은 다수 민중이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는 계층 분하에 따른 권력 이동이 다수의 사회 설계 참여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데 방해물로 작동했다. 사회 설계 참여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형식적 기득권층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계층들의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국민 국가 형태 자체가 실질적 기득권층의 사장마저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형태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국민 혹은 시민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다수에게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열어 둔 사회 형태다. 따라서 그러한 자유가 확대되는 데 방해물로 작동한 일제 강점기가 국민 국가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여전히 일제 강점기가 근대 국민 국가의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주장은 무엇인가? 이 땅은 자생적으로 근대화될 여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일제 강점기를 통해 근대화에 필요한 사회적 기반과 인적 자원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기를 뛰어난 곳으로 여기를 후진 곳으로 여기고 근대화를 후진 곳이 뛰어난 것을 단순히 모방 수용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실례로 일제 강점기 시절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선택의 자유 개념이 이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민중들이 자유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동양적 자유 개념은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여기의 씨앗 개념이 될 수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물론 그 씨앗 개념은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 개념으로 변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변통될 가능성은 이 땅의 역사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그러한 가능성이 뒤늦게나마 실현될 여지를 차단시켜 버린 사건이었다. 서양의 근대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과정이 이 땅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실현될 가능성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땅의 경우, 근대를 대표한다는 국민 국가 형태는 다수의 동의 없이 해방 이후 제도적으로 정착했다. 처음부터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국민 국가의 이념이 정착시킨 세력은 분단 상황을 이용해 자유에 대비되는 것은 무조건적 악으로 평가하는 사고방식을 교육과 언론을 통해 퍼트렸다. ‘국민 국가 형태가 다수의 동의 없이 해방 이후 제도적으로 정착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모두가 사회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사회적 인식의 결여 속에 제도적으로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소수 기득권층에 대한 다수의 요구가 본격적으로 사회 설계 참여를 함축하게 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해방 이후 이 땅의 산업화 과정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이 점은 경제 성장을 가속화시킨 해방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근대적 긴장감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그 산업화 과정이 독재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재 권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소수 대 다수의 갈등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의 목적과 수단이 상호 평가되는 구체적 과정은 누락되고 말았다.

 

누구나 동의하는 소수 기득권층이 정해져 있고, 더욱이 그 기득권층의 정치적 이념 등이 명확하다면, ‘적과 아군을 나누는 전략 혹은 누가 내 편인가를 가리는 전략은 소수 대 다수의 극단적 갈등 상황에서는 현저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계층 분화 및 거래 관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어느 입장이 현실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는가를 가리는 전략이 다수의 주목을 받을 때 사회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으며, 소수 대 다수의 극단적 갈등도 긍정적 방향으로 희석된다. 이러한 긍정적 방향의 갈등 희석 과정을 통해 계층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야, 국가의 각 개인은 법적 의미를 넘어서 실질적 의미에서의 시민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이 땅은 독재 권력 붕괴 이후에도 소수 대 다수의 극단적 대립 관계가 긍정적으로 희석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독재 권력이 지배한 시대의 기득권층들이 독재 권력 붕괴 이후에도 정계, 재계, 교육계에 여전히 남아 있다. 더욱이 급속한 산업화의 수반 효과로 나타난 경제적 재분배 현상에 다수가 길들여져 있는 바람에, 독재 시절 잠재되어 있던 정치적 차이들이 다수 대 다수, 여기에 그 경쟁에 무관심한 또 다른 다수 사이의 파벌 갈등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이 때문에, 소수 대 다수의 갈등은 긍정적으로 희석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누가 나의 편인가를 가리는 전략이 여전히 대세인 가운데, 그 갈등은 새로운 방식의 다수 대 다수의 파벌 갈등 속에서 부정적으로 희석되고 있는 조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핵심을 수긍하는 경우,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이라는 근대화의 성향은 이 땅의 경우 다음과 같이 요약 가능하다.

 

(B1) 근대화를 산업화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근대화는 어느 정도 종결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대화를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근대화는 아직 종결된 것으로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과 계층들의 수평적 관계 사이의 간격은 나라별로 차이를 보인다. 이 땅에서 그러한 간격은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산업화에 먼저 성공한 나라들보다 여전히 더 크다.

 

이제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을 세속화와 근대화의 관계와 연관지어 (B1)의 결론을 구체화해 보자.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을 철학적 정당화와 무관하게 누구나 무시할 수 없게 된 상황은 아무런 역사적 맥락과 상관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은 오랜 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이다. 그 생성 과정을 논할 때 빼먹을 수 없는 것이 종교가 사회 통합의 원리로 더 이상 작용할 수 없게 되는 세속화 과정이다. 이 땅과 달리 서양의 경우 그러한 세속화 과정은 비록 후대에 의식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랜 기간을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의 핵심은 살펴보았듯이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이었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고 가정하고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는 경우, 비록 가상이지만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의 핵심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그 실현 과정과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종교의 권위를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기능적 측면에서는 유사해도 내용적 측면에서는 다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의 핵심인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은 인간 중심 사상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약화시켜 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이후 기득권층을 제어할 수 있는 실천적 의미의 정치론이 이 땅에서 실험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한 실험을 이끈 어느 급진주의자가 19세기 중엽 서양의 비판적인 급진주의자를 만났다고 해보자. 그들 모두는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민중에게 확산되고 실현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대화가 지속될수록 그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러한 자유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이 여기저기에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의 그 과정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의 핵심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인간 중심 사상을 탈색시키고, 동양적 자유 개념인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이 소극적 의미에서 적극적 의미로 해석되게 되는 과정이다. 반면에 저기의 그 과정은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의 강화와 함께 나타난 선택의 자유 개념이 사회 영역들 가로지르기 방식으로 확대된 과정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방식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 제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음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필요한 현실이라는 것은 그 어떤 철학적 정당화나 종교적 교리와 무관하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필요한 현실은 다름 아닌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더 이상 무시될 수 없게 된 사회 상태를 뜻한다. 이때 그들이 두 번째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이다.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의 생성 과정을 설명할 때, 세속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저기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정 입장, 실례로 계몽주의의 입장과 같은 것이 세속화 과정에 대한 필연적 원인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집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세속화 과정의 맥락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느 과정이나 실패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속화 과정 자체도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생성에 대한 필연적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길 거부하는 지적인 무종교인일수록 위 결론을 이해하기 쉽다. 그렇지 않은 무종교인은 위 결론에 수긍하더라도 근대화는 세속화를 함축한다는 주장에 현혹당하기 쉽다. 그러한 주장은 이 작업의 맥락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세속화 과정은 근대화와 중첩되더라도 더 오랜 과정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화 및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등의 근대화의 성향이 서양의 세속화를 가속시킨 것은 맞지만 수백 년 전에 이미 가시화되었다고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반면에 세속화 과정의 핵심인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이 위협받기 시작한 시기는 적어도 16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서양의 경우에 국한해 생각할 때 근대화가 세속화를 함축한다거나, 근대화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세속화를 수반한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없는 지역에 대해서도 근대화가 세속화를 함축한다고 단순하게 주장할 수 없다. 산업화와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의 성향이 종교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수가 무종교인으로 구성된 사회 상태를 보장하지 않는다. 또한 계층 분화가 자연스럽게 계층 가로지르기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계층이 개인의 적소가 되는 사회 상태를 보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이 산업화를 기반으로 한 근대화 과정에서 반드시 탈종교적 색채를 띠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근대화가 세속화 과정을 반드시 함축해야 하는 것이라면, 세속화는 근대와 전근대 혹은 근대와 반근대를 명확히 이분해 주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세속화를 그러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경험적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반례에만 부딪칠 것이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를 진단할 때, 근대화가 더 강조되어야 하는 곳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 이 땅은 사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 땅에 세속화 운동과 같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다고 세속화 조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조짐이 아예 없었다면,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근거한 가상의 역사는 실현될 수도 있었던 것아니라 허구의 구성물에 불과하다. 실현될 수도 있었던 것은 적절한 시기를 놓쳤더라도 늦게나마 다수의 주목을 받을 여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 여지마저 일제 강점기에 의해 가로 막혔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세속화를 논할 때 일제 강점기 이후의 산업화와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 등의 근대화의 성향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근대화는 세속화를 함축한다는 주장에 현혹당하기 쉽다. 그렇게 현혹당하는 경우, 역사는 그 주장에 짜 맞추어진다. 그 결과, 종교적 권위의 동력을 약화시킨 자생적 요인들과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요인들의 분류 및 그 요인들 사이의 실제적 상호 작용 등에 대한 깊은 분석은 등한시된다. 그러한 분석은 이 땅의 세속화라는 별도의 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경우의 부작용을 인식하는 것이다.

 

집단의 정체성 형성, 유지 및 변화와 맞물린 역사에서 과거들 사건 자체가 현재에 대한 인과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에 대한 필연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재도 미래에 대한 필연적 원인이 될 수 없다. 과거 자체가 현재에 인과적 힘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를 규격화하는 관습이나 규범 및 세계 이해 방식을 통해서 과거는 여전히 현재에 살아 숨쉰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거의 그러한 것들을 전통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모든 제도나 정책은 미래 지향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그러한 제도나 정책을 통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위를 제한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전통이라는 ()’과 미래 지향적인 정책 및 제도라는 ()’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현실 문제들을 통해 행위자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이중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현재를 생물에 비유할 때, 현실 문제 해결에 부적합한 과거의 전통이나 미래 지향적인 정책 및 제도는 숨통의 죄는 것과 같다. 이를 기준으로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이라는 근대화의 성향을 진단해 보자.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으로 구성된 신유학의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오랜 동안 이 땅의 지배 원리로 기능했다. 무엇보다도 신분제를 정당화하고 지속시킨 밑그림과 같다.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갖는 내용적 비정합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탈색시키면, 그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결합시켜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낼 수 없다. 이에 바탕을 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은 실현될 적절한 시기를 놓쳤다. 뒤 늦게나마 실현될 여지마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가로 막혔다.

 

해방 후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새로운 가치 체계들이 외부에서 유입되고, 종교 시장도 형성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신분제 사회의 과거 전통이 현실에 맞게 자생적으로 변통되거나 다른 것으로 완전히 대체된 것은 아니다. 재산, 학벌, 정치적 권력의 결합에 의한 특정 계층은 사실상 실질적 기득권층으로서의 상위 계급처럼 기능하고 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과거 신분제 사회의 전통을 지배한 세계 이해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더라도, 그러한 특정 계층의 상당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마치 과거 양반들처럼 행동한다. 문제는 이러한 세태를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다수마저도 그 특정 계층에 속하길 바라며, 그러한 바람이 그들의 미래가 되어 그들의 현재 삶을 억누른다는 데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계층은 개인들에게 자족(自足)할 장소로서의 적소 찾기의 표적이 될 수 없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계층들이 개인에게 그러한 표적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계층 간 수평적 관계를 실현할 제도적 장치마저 부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땅의 다수에 속하는 무종교인 계층의 의견은 공론화될 여지마저 막혀 있다. 이는 다수 계층을 보호하는 정책 부재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이 땅의 민주주의 진화를 위해서 필요한 이유는 이 작업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것이다.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이라는 근대화의 성향이 갖는 또 다른 다음의 특징은 그 곳에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B2)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이 땅의 경우, 과거 신분제 사회의 전통이 산업화에 어느 정도 성공한 현실에 여전히 남아 있다. 직업군의 수적 증가로 인해 계층 분화는 가속화되었지만, 계층들 간 수평적 관계의 실현 정도는 약하다. 개인에게 계층은 여전히 자족할 장소로서의 적소 찾기의 표적이 될 수 없다. 다수 계층을 보호하려는 구체적 정책마저도 부재한 사회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