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세속화와 근대화 6. 인종주의의 쇠퇴

착한왕 이상하 2015. 1. 12. 01:39

지동설은 신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천체에 지구를 속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지동설의 출현으로 자연에서 인간의 지위도 재해석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재해석 문제를 놓고 진보론’, ‘회의론’, ‘종말론이 나타났다.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진보론인간 중심 사상’,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자율적 인간상이라는 특징들을 갖는 인간의 천사화 계획을 태동시킨 모태와 같다. ‘인간의 천사화 계획의 연장선에 서 있는 계몽주의는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는 관점 속에서 회의론을 극복하고 종말론과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를 둘러싼 여러 상반된 입장들이 우리 유럽이라는 이념 아래 공존할 수 있도록 해준 실질적 기반은 백색 도덕 제국주의였다.

 

백색 도덕 제국주의를 구성하는 세 특징은 인종주의’, ‘유럽 중심 사관’, ‘간섭주의이다. 인종주의의 백색’, ‘황색’, ‘홍색’, ‘흑색은 단순히 피부색을 뜻하지 않는다. 각각의 색은 특정 인종 유형에 해당하는 고유한 기질과 행위 규범을 뜻한다. 유전적 인종 유형 개념이 생물학적 근거를 결여한 것으로 밝혀진 후에도, 문화를 우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 속에서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백인 문명에 속하는 지성인을 계몽된 사람으로 간주하고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파악하는 것이 유럽 중심 사관이다. 백인은 백인 문명에 속하지 않는 열등한 집단의 역사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 간섭주의이다. ‘인종주의’, ‘유럽 중심 사관’, ‘간섭주의라는 세 특징을 갖는 백색 도덕 제국주의는 18세기 말 이후 세계의 중심 무대로 떠오른 유럽의 시대적 분위기를 대표한다. 계몽주의와 대립했던 낭만주의 계보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급진적 무신론자 진영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백색 도덕 제국주의는 강대국의 식민지 팽창 정책과 함께 세계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식민지가 필요했다.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철강 등 물자 생산으로 독일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독일이 차지할 식민지 지역은 더 이상 없었다. 더욱이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대공황이 발생하자,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독일은 단기적으로는 도로망 등 내부 기반 시설 확장 사업으로, 장기적으로는 영국 및 프랑스 등이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 지역들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 결과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식민지 팽창주의도 끝난다. 이는 백색 도덕 제국주의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 세태의 흐름을 반영한다. 물론 강대국 주도의 세력 확장 정책은 여전히 국제 정치, 경제 영역에 남아 있다. 백색 도덕 제국주의의 유럽 중심 사관은 비판 대상이 되었어도, ‘저기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식자층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인종주의를 전제한 간섭주의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간섭 행위도 여전히 남아 있다. 반면에 인종주의를 반영하는 제도가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 점은 각국의 인권 헌장에 반영되어 있다.

 

철학자들은 인권 개념을 논할 때 종종 천부 인권설이 주장된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거의 인권 개념은 오히려 식민지 팽창 정책을 옹호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실례로 천부 인권설에 근거해 자연을 이용하는 능력을 소유권과 연관시켜 아메리카 원주민을 식민지화하려는 동기를 정당화한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과거 17세기나 18세기의 인권 개념을 현대적 인권 개념의 기원으로 잡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더욱이 당시에는 인권에 대한 인식도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인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금기시될 정도로 인권 개념을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종교적 신념처럼 여기게 된 시기는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인권 개념이 기능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그 개념적 복수의 측면은 인권을 보호하는 법적 준거틀 및 구체적 조항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분명해 진다. 이렇듯 현재 인권 개념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도, 문화 및 제도적 측면에서 특수성을 띠고 있다. 이 점은 인권에 대한 여러 입장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인권은 그 어떤 다른 권리로 양도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인권 개념은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자, 그러한 해방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라는 입장이 있다. 인권은 조화로운 공동체 유지를 위한 정치적 원리로서 다수가 합의 가능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반면에 이론적 수준에서 논의되는 인권 개념이란 현실 문제 해결에 아무것도 시사하지 않는 과대포장의 수사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첫 번째 입장에 따르면, 인권은 주어진 객관적인 것으로서 누구나 따라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입장에 따르면, 인권은 주어진 객관적인 것이 아니지만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자라면 옹호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에 따르면, 인권은 정치적 원리로서 합의 가능한 것이다. 네 번째 입장은 인권에 대한 회의론이다. 첫 번째 입장에서 네 번째 입장으로 갈수록 인권에 대한 믿음의 정도는 확실한 것에서 불확실한 것으로 약화된다. 하지만 네 번째 입장을 무조건 인권 반대론으로 몰아 세워서는 안 된다. 그 입장은 단지 추상적이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인권 개념에 대한 만인의 합의 불가능성 및 실제 문제 해결 과정에서의 구체성 결여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권 개념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전제하지만, 이에 대한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배려하려는 태도가 인권 개념을 전제한다는 생각은 인권 옹호론과 인본주의를 동일시하는 선입관에서 기인한 착각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동체 중심의 과거 사회 형태나 원시 부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 의해 뒷받침된다.

 

인권을 둘러싼 논쟁은 이 작업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는 인권 개념을 역사라는 여과기에서 걸러진 교훈과 같은 권고 사항으로 여기는, 제도화 등 실천적 측면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정도의 인식만 필요하다. 그러한 인식 아래 지역 및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 인권을 제도화하려는 집단적 노력을 통해서만 인권에 대한 개인의 의식도 성숙할 것이다. 인권에 대한 어떤 이론적 혹은 보편적 규정 방식보다는 인권을 제도화한 경우에서 나타나는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 유사성은 하나 같이 인종주의에 근거한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로 1948년 제정된 유엔 인권 선언문(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의 조항 2, 3, 그리고 1950년 제정된 유럽 인권 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의 조항 3을 들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인종을 노예화하는 것을 엄격히 금기시하는 각 3조의 내용이다. 유럽의 노예제는 인종주의를 반영하는 대표적 제도였다.

 

서양의 노예제는 식민지 정책과 밀접히 맞물려 있다. 실례로 16세기 이베리아 반도 세력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행위를 들 수 있다. 그 시기는 몽골의 유럽 침공으로 인해 아랍 문명이 반도에서 약해져 유럽인의 대항해가 가능해졌던 시기였다. 노예제가 본격적 정책 대상이 된 시기는 유럽이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18세기 중엽 이후이다. 이후 서양의 식민지 팽창 과정과 함께 인종주의 관점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확산되었다. 식민지 팽창은 저항 없이 진행될 수 없었다. 당연히 식민지화된 지역의 강한 반발이 뒤따랐고, 식민지를 놓고 벌어진 강대국들의 경쟁은 결국 세계 대전이라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 현재 인권 개념이 싹텄으며, 이렇게 되는 데에는 식민지 지역 다수 민중들의 기여가 있었다. 따라서 인종주의의 쇠퇴라는 근대화의 성향을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만 서술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C1) 인종주의의 쇠퇴라는 근대화의 성향은 식민지 지역 다수 민중의 저항 과정 및 강대국들의 식민지 경쟁에 따른 제 2차 세계 대전과 함께 한다. 인권을 당연시하는 현재 세태는 인종주의의 어두운 면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며, 그러한 인식이 자리잡는 데에는 식민지 지역 다수 민중의 기여가 있었다.

 

이 땅은 백색으로 상징된 문명권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C1)은 이 땅의 근대화 과정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X가 있을 수 있다. X의 주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거 1>

일본의 식민지 국가들은 일본인과 유사한 종족에 속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발상인 것은 맞지만 피부색에 따른 인종주의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근거 2>

일본은 주변 식민지 지역 사람들에게 일본 시민 자격을 부여했다. 식민지 지역 사람들은 해당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일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이는 식민지 지역 사람들을 일본인과 똑같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간주한 당시 정책에 잘 반영되어 있다.

 

위 두 근거는 단순히 역사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증거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피부색에 따른 인종 간 위계질서를 함축한 인종주의는 혈통 중심의 민족 혹은 종족 간 위계질서를 함축한 인종주의로 확대 해석 가능하다. 두 종류의 인종주의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다음의 공통된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의 핵심 사고방식>

인종주의에서 문화는 단순한 비교 대상이 아니라 가치 매김의 척도이다. 특정 지역의 문화는 그 가치가 높아 문명으로 규정되는 반면, 다른 지역의 문화는 야만으로 규정된다. 특정 지역의 사람들만 그러한 문명을 건설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신시킬 수 있는 기질 및 능력을 갖고 있다.

 

<인종주의의 핵심 사고방식>에서 백색은 서양 문명의 가치체계, 그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기질 및 능력을 상징한다. 일본의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평가할 때, 그러한 백색 개념에 대응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와진(和人)’이다. 와진에 속하는 사람과 와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고 전자를 기준으로 후자를 차별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잔존해 왔으며, 현재 이민법 등의 제도에도 남아 있다.와진백색에 대응시켜 생각해 보면, ‘와진에 근거한 우월 의식과 백색에 근거한 우월 의식 양자에는 공통적으로 <인종주의의 핵심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전자는 혈통 중심의 인종주의라면, 후자는 피부색 중심의 인종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X<근거 1>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X<근거 2>를 들어 <근거 1>에 대한 이러한 반박이 성립하지 않음을 강조할 것이다. <근거 2>를 보면, 일제는 식민지 지역 사람들도 와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 2>를 들어 <근거 1>에 대한 반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X의 항변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첫째, <근거 2>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는 황색중심의 인종주의가 깔려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당시 일본은 자국 내 토속 아이누족을 와진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고 열등한 종족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와진을 식민지 지역 사람들에게도 확대 적용한 정책은 백색에 근거한 인종주의에 대항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대항 방식은 황색에 근거한 인종주의였다고 해야 한다. 둘째, 식민지 지역 사람들도 와진으로 분류한 실질적 동기는 노동 자원을 확보하고 해당 지역을 일본에 통합시키려는 것이었다. 더욱이 식민지 지역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방식은 와진개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2차 대전 말기에 이를수록 식민지 지역에서 징집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극심해졌다. 식민지 지역 노동자들 중 약 30~40% 정도가 비인간적인 착취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이 땅이 백색으로 상징된 문명권의 직접적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이 땅에 대한 (C1)의 적용 불가능성을 주장할 수 없다.

 

(C2) 이 땅은 백색으로 상징된 문명권의 직접적 식민지가 아니었어도, 이 땅의 다수 민중들은 인종주의 쇠퇴에 기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을 식민지화한 집단의 이념과 정책에는 인종주의의 핵심 사고방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