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파르메니데스의 제 3의 사람 논증 4. Predicates pros heauto vs. ta alla

착한왕 이상하 2015. 3. 29. 22:26

4.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당연히 TMA를 피해 나갈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TAM는 그들의 형상론을 반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플라톤은 TMA를 피해 나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는 <파르메니데스>에서 TMA를 피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위 문제를 ‘TMA 문제라고 하자. 앞서 살펴본 현재의 TMA 구성 방식을 고려할 때, 그 해결 방법은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다.

 

TMA의 무한 후퇴 논증은 OM, SP, NI에 근거하고 있다. 무한 후퇴가 발생하지 않도록 OM, SP, NI 모두 혹은 적어도 하나를 부정 혹은 수정하거나, 적절히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OMU는 더 이상 모순 관계를 맺지 않게 된다.

 

TMA의 무한 후퇴 논증을 받아들이고, U를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것이다.

 

위 두 방법 중 두 번째는 일반적으로 선호되지 않는다. 그 방법은 플라톤의 형상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방법을 선호해야만 하는 별도의 작업이 요구된다. 따라서 첫 번째 방법에만 주목하자. 이때 OM을 부정 혹은 수정하거나 적절히 재해석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OM은 플라톤 형상론의 핵심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NI를 부정 혹은 수정 하거나 적절히 재해석하는 것은 논외로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TMA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관시켜 논하는 경우에 더 의미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NI에는 경험적 대상들과 형상들의 분리성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한 분리성 관점은 플라톤 해석에서 쉽게 부정되기 힘들다. 반면에 경험적 대상들에 형상이 내재해 있다고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NI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NI를 부정 혹은 수정하거나 적절히 재해석하는 방식은 TMA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관시켜 다룰 때 더 의미있다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받아들이면, SP를 부정 혹은 수정하거나 적절히 재해석하는 방식만이 남는다.

 

여러 문헌에서 플라톤은 형상들에 대해 자체 술어 서술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이 TMA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조건 SP를 부정하거나 수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한 후퇴가 발생하지 않도록 SP를 적절히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TMA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일반적 절차는 다음과 같다.

 

() TMA의 무한 후퇴 성격의 결론이 발생하지 않도록 SP를 재해석한다.

() 그러한 재해석에 따라 OM, SP, NI에 근거한 TMA의 구성 방식에는 오류가 있음을 보인다.

() 따라서 OMU의 양립 가능성은 TMA에 의해 위협받지 않는다.

 

위의 ()~()에 따른 TMA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러셀(B. Russell)의 방법을 들 수 있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OM‘o is F‘oF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로 해석되어야 하는 반면, SP‘F-ness is F에서 ‘be’‘=’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Socrates is wise)’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유일한 스승이다(Socrates is the only teacher of Platon)’에서 ‘be’ 동사의 해석은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는 집합론적으로 ‘Socartes{x|x는 현명하다}’를 뜻하지만 후자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유일한 스승을 뜻한다는 것이다. 현대 논리학과 집합론에 근거한 이러한 구분을 받아들이면, TMA는 논리적 오류를 함축한 것이다. 그러한 구분에 따라 ‘o1, o2, ..., on, F-ness’ 모두에 대해 일률적으로 OM을 적용할 수 없는데 그렇게 적용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오류를 함축한 논증은 타당성 평가에서 제외되므로, TMA의 타당성을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 따라서 주어진 대상들에 대해 무한개의 형상들이 가능하다는 TMA 결론도 성립하지 않게 되므로, OMU의 양립 가능성은 위협받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논리학 및 집합론에 근거해 TMA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한 방식은 플라톤이 생각했던 방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TMA 문제 해결 방식을 플라톤 문헌들에 근거시키려고 할 때, 주목받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 중 위 절차 ()~()을 따른 것을 들라면, ‘다른 것과 관계맺는 술어(predicates pros ta alla) 해석그 자체와 관계맺는 술어(predicates pros heauto) 해석의 구분에 근거해 TMA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메인왈드(C. Meinwald)의 입장이다. 그 구분이 플라톤의 문헌들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는 논외로 한다. 여기서는 그 구분에 대한 메인월드의 정의 방식만 간략히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다른 것과 관계맺는 술어 해석IA라고, 그리고 그 자체와 관계맺는 술어 해석IH라고 하자. 이때 IAIH는 각각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F(x)’, ‘x is FIA에 따라 참이라는 것대상 xF인 어떤 특징을 갖는다를 뜻한다. 이때 그러한 특징이 x의 내재적이며 본질적 속성일 필요는 없다.

 

F(x)’, ‘x is FIH에 따라 참이라는 것F는 의미적으로 대상 x의 부분이다를 뜻한다.

 

IA의 규정 방식은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일반적인 술어 논리의 규정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Socrates is just)’라는 진술을 생각해 보자. 이때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는 특징을 갖는 대상으로 해석된다. 소크라테스가 일생 동안 정의로울 수는 없다. 또한 정의로움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타고나면서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정의로움이란 소크라테스의 내재적이며 본질적 속성일 필요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지금 정의롭다고 판단되더라도, 다른 순간에서는 그렇게 판단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를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그 사람에 비해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될 수 있다. 만약 그 사람이 아주 비열하다면, 소크라테스는 그 사람에 비해 정의롭다고 판단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롭다는 것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함께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모든 경험적 대상들은 다른 것들과의 비교 관계 속에서 F이거나, F가 아니다. 이를 대립적인 것들의 통시적 공존성(diachronical compresence of opposites)’이라 할 때, 모든 경험적 대상들은 대립적인 것들의 통시적 공존성을 갖는다. 그러한 공존성을 가진 경험적 대상들에 대해서는 IA, 즉 다른 것과 관계맺는 술어 해석이 적용된다. 소크라테스도 경험적 대상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라는 진술은 IA에 따라 다른 것과의 비교 관계 속에서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된다.

 

IH의 규정 방식은 IA에 비해 상대적으로 애매모호하다. ‘F는 의미적으로 대상 x의 부분이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메인왈드는 ‘x의 본성이 F에 함축된 속성을 포함함이라고 말한다. 실례로 정의는 덕이 있는 것이다(The just is virtuous)’IH를 적용하는 경우, ‘정의덕이 있음을 의미적으로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적이라는 것은 내연적(intensional)’으로 해석 가능한데, 이는 다음에 근거한다.

 

정의롭다는 것과 덕 있음은 외연적(extensional)으로 분류 체계를 이룬다고 하자. , ‘{x|x는 정의롭다}{x|x는 덕이 있다}가 그 분류 체계에서 성립한다고 하자.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정의롭다는 것과 덕 있음을 만족하는 경험적 대상들에 대해서 ‘대립적인 것들의 통시적 공존성’이 성립하므로, 두 외연 {x|x는 정의롭다}와 {x|x는 덕이 있다}가 항상 고정된 것은 아니다. 판단 상황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각 외연에 속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각 판단 상황에 대해 ‘{x|x는 정의롭다}{x|x는 덕이 있다}가 성립한다는 점에서, 정의롭다는 것과 덕 있음은 외연적으로 분류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류 체계를 가정할 때, 외연과 내연의 비대칭성이 나타난다. 정의롭다는 것의 내연, 즉 정의롭다고 불리는 모든 것들에 공통된 속성들의 모임은 덕있음의 내연, 즉 덕을 갖추었다고 불리는 모든 것들에 공통된 속성들의 모임을 포함한다. 이때 정의롭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반드시 덕있음을 전제하지만, 이에 대한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의롭다는 것의 내연을 안다는 것은 동시에 덕있음의 내연을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덕이 있는 것이다라는 진술은 주어부의 정의에 대한 지식만으로도 항상 참이다. 이 때문에, 해당 진술은 덕있음의 술어를 만족하는 대상들의 관계와 무관하게 참이다.

 

IH에 대한 위 해석 방식이 모둔 술어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메인왈드의 TMA 문제 해결 방식의 불충분성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에서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IH에 대한 위 해석 방식을 받아 들이자. 결국 주어의 내연적 의미가 술어의 내연적 의미를 포함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주어부에 들어가는 대상의 본성은 이미 술어의 속성을 부분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 주어부에 들어가는 대상의 본성에 대한 지식만으로도 해당 진술은 참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실례로 물체는 크기를 갖고 있다에서 물체적인 것의 본성은 크기를 갖고 있음이라는 술어의 속성을 부분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해당 진술은 그 자체로 참이라는 것이다.

 

정의는 덕이 있는 것이다라는 진술이 항상 참으로 판단될 때, 그 진술에 적용되는 술어 해석 방식은 IA가 아니라 IH이다. 정의의 본성은 내연적으로 덕 있음의 속성을 부분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진술은 그러한 속성을 만족하는 대상들과 무관하게 항상 참이다. ‘정의는 정의롭다(The just is just)’라는 진술에 IH를 적용하는 경우에도 그 진술은 항상 참이다. 정의의 본성은 정의롭다고 불리는 것들과 무관하게 정의롭다는 것의 의미를 부분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SP‘F-nessF에 적용되는 술어 해석은 그 자체와 관계맺는 술어 해석방식 IH이다. 반면에 OMNI‘oi(1in)F에 적용되는 술어 해석은 다른 것과 관계맺는 술어 해석방식 IA이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TMA는 단지 두 가지 술어 방식을 혼선해 사용한 오류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다.

 

OM에 따라 F를 만족하는 대상들 o1, o2, ..., on이 참여하는 적어도 하나의 F와 관련된 형상 F-ness’가 있다. 이때 ‘oi(1in)FIA에 따라 참으로 판단된 것이다. SP에 의해 F와 관련된 그러한 어떤 F-nessF이다. 이때 F-nessFIH에 따라 참으로 판단된 것이다. NI에 의해 F-ness는 각 oi(1in)가 아니다. 이렇게 하여 서로 다른 o1, o2, ..., on, F-ness를 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oi(1in)FIA에 따라 참으로 판단되었다. 반면에 F-nessFIH에 따라 참으로 판단되었다. 만약 F-nessFIA를 적용하는 경우, 해당 진술은 거짓이 되어버린다. 그러한 경우에도 해당 진술이 참이 되려면 F-nessF를 만족하는 다른 대상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이는 IH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o1, o2, ..., on, F-ness에 대해 다시 OM을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TMA의 무한 후퇴 논증은 IAIH의 구분을 무시하고 o1, o2, ..., on, F-nessOM을 적용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류를 함축한 논증이다. 절차상 오류를 함축한 논증은 타당성 평가에서 제외된다. 타당성 평가에서 제외된 TMA를 가지고 OMU의 양립 불가능성을 주장할 수 없다.

 

이제 현재 대세인 TMA 구성 방식이 아닌 블라스토스의 구성 방식을 살펴 볼 것이다. 블라스토스의 TMA 구성 방식에서 F-ness는 변수가 아니라 특정 형상의 이름처럼 취급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블라스토스의 TMA 구성 방식에서 SPNI는 현재 대세인 구성 방식과 달리 서로 모순적 관계를 맺게 된다. IAIH의 구분 방식을 블라스토스의 TMA 구성 방식에 적용하는 경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경우, 블라스토스의 TMA 구성 방식에서도 SPNI가 모순되지 않으면서 TMA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인왈드의 말처럼 우리는 TMA잘 가라(goodbye)’를 선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그렇지 않음을 논할 것이다. 그렇게 논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3의 정의로움 논증’, ‘3의 아름다움 논증혹은 3의 크다는 것의 논증과 같은 용어 대신 3의 사람 논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도를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