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문제를 공유하는 사회(무종교인의 관점에서)

착한왕 이상하 2015. 6. 1. 19:03

* 다음 글은 '봉인 시킨 <세속화와 민주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세속화와 민주의의>가 봉인된 상태에서 다음 글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닐 수 없음을 밝혀둔다.

 

신앙심이 없는 무종교인은 고대에는 사회에 반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여러 종교들의 세력 분포 방식에 기반을 둔 고대 사회에서 각 종교의 교리나 제의는 사회 유지에 필요한 덕목 및 관습들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무종교인은 더 이상 사회에 반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땅의 무종교인들은 여전히 확산 계층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종교인들의 의견이 사회에 표출되어 공론화될 기회는 차단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의 논의로만은 위 물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무종교인의 딜레마가 민주주의의 개선을 위해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 물음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함축한 대답을 요구한다면, 그러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사실들로부터 특정 당위성을 확실하게 이끌어낼 수 없을뿐더러, 사회의 예측하기 힘든 변화 방식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전략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은 다음 물음을 경유해야 한다.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무종교인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신론자 진영과 특정 종교 세력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무신론자 진영에 편들기를 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점만 보여도, 다음 결론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해소하려는 무종교인들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을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해결하겠다는 혹은 현 민주주의를 개선시키겠다는 평가 맥락속에 포섭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신론자 진영 대 종교 세력의 갈등과 같은 것은 이 땅에서 벌어진 적도, 또 벌어질 이유도 없었다. 그러한 갈등이 지금 현실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황임을 인정하더라도, 그 갈등 맥락은 결코 무신론자 진영에 정당성을 실어 주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적인 것이 반드시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을 반드시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전제하는 경우,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에 바탕을 둔 기독교와 같은 종교의 교리를 기준으로만 종교적인 것종교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이때 그러한 신 개념을 함축하지 않은 유교 등은 종교적인 것의 범주에서 제거된다. 이를 바탕으로 유교에서 종교적 측면을 잘라 내고 정치 사상적 측면만을 강조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존재의 당위성을 다루기 위해 고안된 종교의 신적이라는 것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제사와 같은 유교적 제의는 유교에 대한 믿음과 상관없이 일상적 관습으로 굳어 졌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유교가 한때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점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 제기를 할 수 없다.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이 없는 유교 교리의 특성을 고려할 때, 서양의 무신론 대 유신론의 갈등과 같은 것이 이 땅에서 벌어지기는 힘들었음은 당연하다. 무신론자 진영 대 특정 종교 세력의 갈등을 논할 때, 그 종교 세력은 어디까지나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에 뿌리를 둔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국한된다.

 

둘째, 서양의 무신론 대 유신론의 갈등은 세속화 과정의 맥락 속에서 부분적인 의미만 갖는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세속화 운동의 중심축은 결코 무신론자 진영이 아니었다. 그 세속화 운동은 특정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 통합 기반으로 기능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의 확장과 함께 일어났다. 그 운동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동참했다. 심지어 당시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기 위해 일부 교회 세력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무신론 대 유신론의 갈등이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서 그나마 일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갈등이 기독교 교리의 전통적 해석을 주도한 고전적 이원론의 대체물을 찾는 과정에서 나타난 계몽주의 사상 등의 형성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몽주의를 세속화 과정의 핵심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라온 사람에게는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자 진영 대 특정 종교 세력 사이의 갈등이 세속화 과정을 촉발시켰다거나 세속화 과정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만약 그 생각이 옳다면, 이 땅의 역사는 그러한 생각에 대한 반례이다. 이 땅은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곳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 땅에는 반유교 대 유교의 심각한 갈등과 같은 것이 발생하지 않았다. 기독교와 유교 모두 저기여기의 사회를 지배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의 기독교와 유교의 세계 이해 방식은 서로 다르다. 과거 신분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은 고전적 이원론이었으며, 유교의 세계 이해 방식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었다. 고전적 이원론은 내용적으로 정합한 하나의 체계를 이룬 반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그렇지 않다. 그 내용적 정합성으로 인해 고전적 이원론의 약화는 붕괴를 함축하며, 그 붕괴 과정은 고전적 이원론을 대체할 것을 찾는 시도와 관련을 맺게 된다. 무신론은 그러한 시도 속에서 서양의 일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반면에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내용적으로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이로 인해, 그 구분 맥락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인식은 이 땅의 과거에 있었으나 사회적 운동 차원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한 실현 과정은 이 땅에도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있었다는 가정 아래 구성 가능한 가상의 역사 속에서만 구체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실현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로 인해 실현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땅의 종교 집단들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민중의 평가를 받는 과정 없이 무분별한 세력 확장을 시도할 수 있었다. 현재 무신론이라는 이념으로 무장한 무신론자 진영과 교회 세력의 갈등은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벌어지지 않고 있다.

 

넷째, 무신론자들이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실제 세속화 과정을 왜곡시킨다.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 상태는 종종 종교성이 사장된 사회 상태 혹은 종교성에 대비된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사회 상태가 정말 세속화 과정에 내재된 궁극적 목적이었다면, 세속화 과정이라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허구의 것이 되고 만다. 이때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을 빌미로 세속화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일부 정치 신학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도용되고 만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이 처음부터 세속화의 특정 규정 방식을 목적으로 삼고 벌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종교성을 사장시키겠다는 목적을 다수의 민중이 추종하고 사회 전체에 확산시킨 경우는 없다. 현재 우리가 세속화 과정이라 부르는 것은 한때 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의 권위가 약화되는 과정혹은 종교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영역일 뿐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뜻할 뿐이다.

 

무신론자 진영 대 특정 종교 세력 사이의 갈등이 세속화 과정을 촉발시켰다거나 세속화 과정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 생각은 저기뿐만 아니라 여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더욱이 여기로 상징된 이 땅은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곳이다. 구조적으로 분화된 현 사회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종교인들이 무분별하게 무신론자 진영에 동조하여 특정 종교를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면, ‘무종교인의 딜레마가 확산 계층의 문제로서 해결되어야 할 민주주의의 딜레마라는 인식은 사회적 담론의 표면으로 떠오를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인식은 무신론자 진영과 특정 종교 세력의 이념적 갈등 맥락 속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도 그들의 의견이 사회에 표출될 공적 기회가 가로 막혀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확산 계층으로 분류 가능하다. 하지만 무신론자 계층은 무종교인 계층과 달리 소수이다. 어느 무신론자가 무신론의 이념보다는 무종교인의 관점, 즉 그 어떤 종교 교리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무관심안 관점을 수용할 때, 그는 무신론자인 동시에 무종교인이다. 또한 무신론을 믿는 무종교인도 있다. 따라서 무신론의 이념에 앞서 무종교인의 관점을 우선시하는 무신론자는 무종교인 계층에 속한다. 반면에 무신론의 이념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여 특정 종교의 사회적 종말을 목적으로 삼는 무신론자는 무종교인 계층에 유입되기 힘들다. 무종교인의 관점에 그러한 목적은 전제되지 않을뿐더러, 사회의 조화로운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목적은 종교를 포함한 사회 영역들의 상호 제한 관계를 고려할 때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은 특정 종교를 사회에서 제거하려는 동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무종교인과 무신론자가 함께 뒤섞일 수 있는 접점 지대는 결코 특정 종교를 제거 대상으로 삼는 것에 바탕을 둘 수 없다. 그 접점 지대의 중심축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 방식에 대한 평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종교의 바람직한 사회적 기능을 바라는 종교인들도 그 접점 지대에 뒤섞일 수 있다. 그러나 무종교인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을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해결하겠다는 혹은 현 민주주의를 개선시키겠다는 평가 맥락속에 포섭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이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의 진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무종교인들은 특정 정치적 이념보다는 문제를 공유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민주주의의 진화 가능성은 우리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특정 정치 체제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적으로 분화된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은 정치, 과학, 교육, 정제 등 여러 영역들을 가로지는 지식망에 근거할 때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를 실질적 실천 목적으로 삼는 경우에도, 그 목적 자체에서 목적 달성에 적합한 수단이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각 정치 체제의 현재 양상은 사회가 내부 및 외부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정치론의 요소들, 심지어 이론적으로 대립 관계를 맺는 정치론의 요소들도 흡수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민주주의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사회의 정치 영역이 오로지 정치 집단들의 이념적 갈등 구도에 지배당할 때, 그러한 갈등 구도 속에 명확히 포섭되지 않지만 사회 개선을 위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은 도외시되어 버린다. 무종교인의 딜레마도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로 여겨질 수 있다. 무종교인의 딜레마가 확산 계층의 문제로 규정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간접 민주제의 모든 정당이 인정하는 다수결 원칙의 비정상적 기능 방식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당들의 이념적 갈등이 정치 영역을 뒤덮어 버릴 때, 무종교인의 딜레마는 사회적 담론 표면으로 떠오르기 힘들어 진다.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다수의 의견을 고려해 해결하려면, 정치 영역은 일정 부분 문제 공유의 공론장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러한 부분이 크면 클수록 해당 사회는 문제를 공유하는 사회에 가깝다. 문제를 공유하는 사회야말로 무종교인의 기여도가 가시화될 수 있는 사회이다. 지적으로 성숙한 무종교인은 단순히 종교 교리 유무에만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 어떤 이념이나 이론에도 정신이 매몰되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적인 무종교인은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도 적용 근거가 부족하다면 다른 이론의 적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가 될 소양을 가진 사람이다. 이 점은 민주주의의 진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무종교인에게 사회 상태란 특정 정치 체제에 기반을 둔 국민 국가 상태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사회 상태는 개인들의 관계망, 개인들의 속성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좀 더 포괄적인 계층들의 관계망, 그리고 제도적으로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개인들의 행동 방식 등에 기반을 둔 총체적 개념이자 그 경계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실재이다. 그 어떤 정치 체제도 그 목적에 부합할 정도로 완벽히 실현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한 문제야말로 사회라는 실재를 파악하게 해주는 원천이다. 사회 상태는 특정 정치 체제에 기반을 둔 국민 국가 상태보다 항상 폭넓은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사회의 모든 중요한 문제가 특정 정치 체제의 맥락 속에서만 진단 가능하고 해결 가능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더욱이 그러한 정치 체제의 정상적 기능을 유도하는 것도 국민 국가 상태보다 폭넓은 사회 상태를 인식하는 개인들이 늘어날 때 가능하다. 이때 이 땅의 무종교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민주주의의 개선을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로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요청을 어떻게 구체화하고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 작업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 작업의 부분적 목적은 이 땅의 실질적 다수인 무종교인들이 인식해야 하는 것들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