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저기'와 '여기'> 후기 1.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

착한왕 이상하 2015. 7. 8. 20:42

* 이 글은 원고 <세속화: '저기'와 '여기'>의 후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전체 원고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 글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전에 올린 것에는 오류가 있어 수정한 것을 다시 올린다.

 

 

이 작업의 성격은 세속화에 대한 담론을 생성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 세속화 담론의 성격은 한 편으로는 역사적이며, 또 한 편으로는 개인적이다. 이러한 세속화 담론의 성격은 다음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적 관계>

(i)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사회 역사는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과정들이다. 그러한 구조적 연결 방식을 구성하는 요인들로는 세계를 이해하는 특정 방식’, ‘관습 및 제도’, ‘인공물들을 바탕으로 한 물질적 기반’, ‘계층들 간 관계’, 등을 들 수 있다.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연결 방식의 변화 및 생성 과정들을 사회 역사적 과정으로 규정할 때, 사회 역사적 과정은 인간의 개입이 빠진 물리적 과정이나 자연의 역사적 과정과는 다르다. 후자의 과정은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실례로 열역학 법칙을 따르는 비가역적 과정이나 태양계에서 지구가 출현하고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은 인간 없이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역사적 과정의 실재성은 물리적 과정이나 자연의 역사적 과정의 실재성과는 다르다. 후자의 실재성에 부여되는 객관성, 즉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이라는 객관성은 전자의 실재성에 대해 일방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따라서 물리적 과정이나 자연의 역사적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역사적 과정을 분석하는 사고방식은 무분별한 것이다.

 

(ii)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 속에서 개인을 고려할 때, 그러한 개인은 철학자들에 의해 가정된 합리적 개인혹은 사회와 분리된 개인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집단의 전통 속에 종속된 개인과 같은 것도 아니다. 사회 통합의 이념 혹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 다양한 욕구를 제어하는 다수의 추구 목적, 제도 및 기술 체계 등의 물질적 기반에 의존적인 연결 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란 실제로는 없다. ‘모든 개인의 공통점혹은 보편적 개인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그 속성들로만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폭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러한 구조적 연결 방식 속의 개인들을 제아무리 일반화하려 해도, 그러한 개인들은 소비자로서의 개인’, ‘신분제를 당연시 여기는 개인’,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실현되길 희망하는 개인등 시대적,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는 개인들이다. 그러한 특수성은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을 반영해 준다. 하지만 이로부터 개인이 특정 관계에 완전히 종속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개인은 사회관계의 물질적 기반에 반응하는 동시에 그 기반의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세상의 그림에 현실을 비추어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수 개인들의 참여 없이는 그 어떠한 관계도 유지될 수 없다. 또한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도 없다. 이 점에서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과 개인은 상호 침투적 연관성을 갖는다.

 

(iii) 개인들과 상호 침투적 연관성을 갖는 특정 구조적 연결 방식이 단순히 그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목적 및 기술적 기반 등에 의해 확실한 경계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의 특정 거래 관계가 다른 거래 관계들과 단절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특정 거래 관계에 대한 언급은 그 관계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를 아우를 수밖에 없다. 개인들의 특정 거래 관계는 다른 거래 관계들과의 뒤얽힘 속에서 변화한다. 더욱이 하나의 거래 관계에 국한된 개인이란 없다. 이 점은 한 개인이 사회 영역들의 다양한 계층에 분포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개인들의 특정 거래 관계는 하부의 거래 관계들을, 그리고 상부의 관계들을 갖게 마련이며, 여러 거래 관계들과 중첩된 경우도 있다. 실례로 19세기 중엽 세속화 운동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거래 관계는 하부로는 가족 등의 관계에 의존적이고, 상부로는 노동자 계층을 기반으로 한 거래 관계에 속하며, 동시에 무종교인들의 거래 관계와 중첩된다. 현 시점에서 파악 가능한 역사적 과정이란 결코 하나의 특정 관계가 고립되어 변화해온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관계들의 다발적 변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시대, 장소에서 서로 갈등한 관계들이 하나의 과정에 속하기도 한다. 실례로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을 논할 때, 계몽주의 옹호자들과 낭만주의 옹호자들의 갈등 관계를 들어 세속화 과정에서 후자의 기여도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임을 논했다.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폭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연결 방식의 변화 및 생성 과정으로서의 하나의 역사적 과정은 개인들의 여러 거래 관계들이 다발적으로 변화해온 과정이기도 하다.

 

(iv) 개인들의 여러 거래 관계들의 다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의 변화 및 생성 과정으로 하나의 역사적 과정을 인식할 때, 그 과정을 하나의 맥락으로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건 및 상황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사건 및 상황들이 반드시 특정 성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은 세속화라고 불릴만한 특정 성향들의 지속성 없이도 세속화된 곳 이다. 이 점은 이 땅이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 땅의 세속화 과정에 비해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종교의 사회적 권위가 약화되는 성향혹은 종교적 교리에 근거한 신분제가 붕괴되는 성향등에 의해 하나의 일관된 맥락으로 인식될 여지가 크다. 특정 성향이 어떤 사회 역사적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하여, 그러한 성향을 그 역사적 과정의 목적이나 원인과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를 목적으로 서양의 세속화 과정이 일관되게 진행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의 핵심으로 묘사된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의 경우, 그 이원론을 구성하는 관점들은 동시적이 아닌 순차적으로 약화되었으며, 그 원인은 당시 정치 체제 및 사회 구조 등과 복잡하게 맞물려 있었다. 더욱이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이 필연적으로 사회의 세속화된 상태로 이어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적으로 거리가 먼 집단들의 역사적 과정들과 뒤얽힌 상태로 인식되는 사회 역사적 과정도 있다. 실례로 인종주의의 쇠퇴라는 근대화의 성향은 특정 지역에서 먼저 생성되고 다른 지역의 모방에 의해 세계 각지로 확산된 것이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근대화 과정은 산업화 성향에서 선후가 어느 정도 갈리더라도 각 지역의 동시 다발적 동참에 의해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v)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논할 때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들은 비동질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각 과정은 그 자체의 시간적 흐름을 가지며, 동일한 과정에서도 부분들의 시간적 흐름은 다르다. 또한 하나의 역사적 과정의 특정 부분에 해당하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은 동시에 또 다른 과정의 부분을 이루기도 하며, 실현될 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과정에 포섭될 가능성을 지니기도 한다. 이를 받아들이면, 모든 사회 역사적 과정들에 공통된 역사의 보편적 구조와 같은 것을 가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런 것을 가정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 왜곡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또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차등적 흐름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시간에 바탕을 둔 보편적 연대기와 같은 것도 부정된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성을 인식할 때, 전체 역사란 그저 그러한 과정들의 다발체일 뿐이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이 동질화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각 과정은 다른 과정과 독립적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iii)에서 언급했듯이,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은 고립계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러한 연결 방식의 변화 및 생성 과정으로서의 특정 사회 역사적 과정에 대한 충분한 고찰은 다른 과정과의 비교를 요구하는 것이다. 더욱이 사회 역사적 과정의 참여자인 개인들의 이동을 고려한다면, 전체 사회 역사란 진행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그 자체의 시간의 흐름을 갖는다는 점에서 비동질적인 과정들의 유기적 다발체로 파악되어야 한다. ‘저기여기의 비교에 바탕을 둔 세속화 담론은 이를 명확히 보여 준다. 왜냐하면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이 땅의 과정과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은 동질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화 과정에서 저기여기의 차이>

(i) ‘세속화 과정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 땅은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곳이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이 땅의 과정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세속화 과정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이러한 반문 속에는 ‘A’라는 수식어가 붙는 과정에는 ‘A’로 불릴 수 있는 어떤 성향이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이 배어 있다. 그러한 생각은 마치 집에 가야겠다는 목적 때문에 집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적 관계>(iv)에 따를 때, 그러한 생각은 고정 관념일 뿐이다. ‘A’라는 과정이 반드시 ‘A’로 불릴 수 있는 특정 성향을 지속적으로 띠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이 땅의 과정에서 종교의 사회적 권위가 약화되는 성향혹은 그러한 교리에 바탕을 둔 신분제가 붕괴되는 성향은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이 땅의 세속화 과정과 차이를 보인다. 물론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서 세속화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사건 및 상황들 각각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사건 및 상황들의 다발은 전체적으로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성향들을 띤다. 이 점은 이 땅의 세속화 과정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ii) ‘세속화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성향과 연관시켜 볼 사건이나 상황들이 이 땅의 과거에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례로 신분제가 흔들린 조선 후기 상황을 들 수 있다. 또한 유교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기존 사회를 개혁하려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신분제를 붕괴시키거나 유교를 변통시키는 방향으로, 그리고 19세기 유럽의 세속화 운동과 유사한 민중적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렇게 이어질 가능성만 있었다. 그래서 그 가능성은 실현될 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역사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근거가 된다. 이 때문에,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직접 대응시켜 볼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실제 과거가 아니라 그러한 가상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내용의 측면에서 서양의 세속화 과정과 다르다.

 

(iii) 이 땅의 세속화 과정과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동질화될 수 없다.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은 이 땅의 자생적이지 않은 다른 지역의 과정, 실례로 서양의 세속화 과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과정은 이 땅의 기여도를 무시할 수 없는 좀 더 광범위한 근대화 과정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의 세속화 과정도 고립된 과정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다른 지역 과정들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자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이 땅의 사회가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절을 거쳐 급속히 변화한 사실은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또한 자유, 평등, 분배에 대한 여기저기의 사람들이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 그리고 무종교인의 딜레마와 같이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도 설명하기 힘든 것으로 남게 된다.

 

이 작업의 전체 내용을 모른 채 누가 이 부분만을 본다면, 그는 <세속화 과정에서 저기여기의 차이>가 단지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적 관계>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보편성을 함축한 어떤 사고 체계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것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생각은 착각이다. 이 작업에서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룬 적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세속화 과정에서 저기여기의 차이>를 보여 주는 담론과 부합한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사회 역사에 대한 한 설명 방식일 뿐이다. 그러한 설명 방식이 이 작업에서 펼쳐진 세속화 담론에 부합한다고 할 때, 그것은 <세속화 과정에서 저기여기의 차이>에서 단순히 일반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화 과정에서 저기여기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 체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의 비동질적 관계>를 다루는 것은 별도의 작업을 요구한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 ‘역사적 과정’, ‘역사적 과정의 실재성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의 보편적 구조를 가정하거나 혹은 일관된 시간의 연대기 속에서 과정들을 규정하는 역사 읽기의 방식은 이 작업의 세속화 담론과 어울릴 수 없는 것임을 보일 것이다. 이를 보이기 위한 물음, 그리고 이어질 물음들을 간략히 다루는 가운데, ‘역사적이면서 개인적인 세속화 담론의 성격을 이끌어 낼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념에 앞서 문제를 공유하려는 무종교인에게 필요한 역사 독법의 준칙들을 제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