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저기'와 '여기'> 후기 2. 세속화 담론의 성격 1

착한왕 이상하 2015. 7. 13. 00:26

* 이 글은 원고 <세속화: '저기'와 '여기'>의 후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전체 원고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 글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살펴볼 첫 번째 물음은 다음이다.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사회 속에 확대되기를 바라는 무종교인들은 가상의 역사로 남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위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은 부정적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인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감정과는 구분되는 추론 및 추상화 과정 등의 합리적 능력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촉진시켰다는 것’,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 ‘나라 간 경계가 느슨해졌다는 것등이 나타나는 과정을 다룰 때, 세속화 과정을 논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후자의 과정을 논하지 않고 전자의 과정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는 이 땅의 과정은 서양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 과정에는 세속화로 불릴 수 있는 성향들이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은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세속화된 곳을 대표한다. 이는 세속화 과정이 반드시 세속화로 불릴 수 있는 특정 성향의 지속성을 전제하거나, ‘세속화된 사회 상태를 목적으로 하여 진행된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또한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나는 방식도 지역마다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은 민주제를 채택한 지역들에 국한하는 경우 사방도처에 혼재하고 있다. 그러한 혼재 속에서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과정도 동질화될 수 없다. 만약 이 땅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면, ‘여기저기의 교차 속에서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개념은 유교와 무관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정착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인식도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사회 속에 확대시키기 위해 이 땅의 가상의 역사로만 남아 있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지금 다시 모색해야 할 당위성은 없다. 또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은 유교가 사회의 통합 원리로 기능했던 시대에서나 의미 있는 요청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이 땅의 현재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 더욱이 지적으로 성숙한 무종교인이 바라는 사회는 이념에 앞서 문제를 공유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그러한 무종교인이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강요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위의 대답은 이 땅의 세속화 과정과 서양의 세속화 과정이 동질화될 수 없음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다. 따라서 그러한 동질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역사의 관점은 부정된다. 그러한 관점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모든 역사에는 어떤 목적을 향해 발달하는 구조가 있다는 관점이다.

 

둘째, 모든 역사에는 어떤 반복되는 과정의 구조가 있다는 관점이다.

 

셋째, 모든 역사에는 공통된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관점이다.

 

첫 번째 관점은 종종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라는 은유로 대표된다. 하지만 그러한 은유가 반드시 전자의 관점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입장에 따르는 경우, 그 관점에서 가정된 보편적 발달 구조가 반영되지 않는 지역의 역사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비정상적 역사가 발생한 이유는 해당 지역 사람들의 나태함’, ‘방만함등의 탓으로 돌아간다. 이 점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글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이 가정한 이상적인 세계에 비추어 그들 자신의 시대를 독자적인 것으로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첫 번째 관점은 특정 지역의 역사를 일반화시킨 것이 불과하다.

 

두 번째 관점은 종종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은유로 대표된다. 그 실례로 소수 지배 체계가 군주제에서 민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형태로 반복되는 과정의 구조’, ‘문제 제공 및 해결 방식을 동시에 갖고 있는 지배적 패러다임 체계의 반복되는 과학의 변화 구조등을 가정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반복되는 과정의 구조성을 가정하는 두 번째 관점에 따르면, 과거 A의 체계에서 B로 바뀌는 과정은 기능적 측면에서 AB의 강한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전제한다. 내용의 측면에서만 AB 사이의 차이가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두 번째 관점은 기능과 내용의 격리 현상을 함축한다. , AB의 기능적 동일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AB의 내용은 비교하기 힘든 것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AB의 차이는 기능적 측면에서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 지배 체계혹은 패러다임의 체계가 기능의 측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경우, 그러한 체계가 지배한 시기는 정상 시기혹은 안정화된 시기, 그렇지 않은 시기는 비정상 시기혹은 혼란한 시기로 규정된다. 이렇게 시기를 나누는 것, 기능과 내용의 격리 현상은 사회 역사적 과정들에 대해 통용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점을 소수 지배 체계가 다양한 정치 형태로 반복되는 과정의 구조를 가정하는 입장에 국한해 밝혀 보자.

 

민주제가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이상에 부합하도록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제를 채택한 나라들 중, 소수 기득권 계층이 형성된 곳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민주제의 기능 방식이 군주제의 기능 방식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결론은 지나치다.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은 민주주의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 특징들이 사회에 확산되는 것을 가로 막는 제도를 민주제의 정상적 기능과 연관시킬 사람은 없다. 이는 두 번째 관점에 함축된 기능과 내용의 격리 현상이 보편적으로 성립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서양의 경우,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나는 과정도 군주제가 붕괴된 이후에야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을 다루기 위해서는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을 다루어야 하며, 군주제는 후자의 붕괴 과정 전체에 걸쳐 존속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경우에도 기능과 내용의 격리 현상은 성립하지 않는다.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은 해방 후 민주제의 정착 과정과 함께 생성된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 번째 관점은 일제 강점기마저도 정상 시기로 허용할 수 있다. 그 시기가 소수 지배 체계였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은유란 과거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 집단에 대한 상징성을 띤 것이지, 두 번째 관점에 대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역사 속에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비역사적 측면, 그러한 측면과 관련을 맺는 특정 세계 이해 방식들과 같은 것이다. 과거의 어떤 사건 및 상황이 현재의 사건 및 상황과 유사하다고 해서, 그 사건 및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건 및 상황의 유사성은 단지 현 시점에서 과거의 기록들을 들여다보고 평가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과정의 구조성을 가정하는 두 번째 관점은 그러한 유사성을 확대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 관점에 따르면, 모든 역사에 공통된 시간의 흐름이 있다. 그러한 시간의 흐름은 역사적 과정들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이다. 물론 두 지역의 과거 역사를 비교하기 위해 모두가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틀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의 틀은 그저 비교를 위한 협약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설령 모든 현상에 선행하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물리적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러한 물리적 시간은 개인들이 참여하는 사회 역사적 과정의 시간과 동일시 될 수 없다. 모든 사회 역사적 과정은 개인들의 거래 관계망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사회 역사적 과정에는 그 자체에 내재하는 시간의 흐름이 있다. 그러한 시간의 흐름은 일정한 속도를 갖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 과정들의 수만큼이나 시간의 흐름들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모든 역사에 공통된 시간의 흐름을 가정하고 두 지역의 과거 역사를 비교하는 경우, 상대 비교에 필요한 중립적 태도는 약화되기 쉽다. 그러한 가정에 맞추어진 연대순으로 두 지역을 비교하게 되면, 경제 및 교육 수준 등 특정 기준만 가지고 한 지역을 앞선 곳’, 다른 지역을 뒤쳐진 곳으로 규정하도록 현혹당하기 때문이다. , 상대적 차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야 할 비교가 우열 비교로 확대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상대 비교에 필요한 중립적 태도가 결여된 대표적 역사 서술 방식은 근대화 과정을 뒤쳐진 곳이 앞선 곳을 모방한다는 서술 방식이다. 그러한 서술 방식 속에 근대화의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인종주의의 쇠퇴라는 성향은 산업화라는 성향에 뒤덮여 버리고 만다. 그 결과, ‘여러 지역의 동시다발적 동참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는 근대화 과정의 측면도 눈에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연대순에 따른 비교를 통해 앞선 곳뒤쳐진 곳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특정 지역의 특수한 문제마저도 다른 지역의 접근 방식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착각에 빠진 사람은 해당 지역 사람들의 의식마저도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실현 가능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를 때, 이 작업에서 펼쳐진 세속화 담론의 첫 번째 성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역사에는 어떤 목적을 향해 발달하거나 반복되는 구조가 있다는 관점을 멀리한다. 또한 모든 역사적 과정에 공통된 시간의 흐름과 같은 것을 가정하지 않는다.

 

특정 지역의 역사적 과정을 일반화하여 과정의 구조를 가정하는 관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글에서조차 그러한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경우는 여전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