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후기 2. 세속화 담론의 성격 3(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5. 8. 27. 22:40

* 다음 글은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후기에 해당한다. 650여 쪽의 본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힘듦을 밝혀 둔다. 

 

 

살펴볼 세 번째 물음은 다음과 같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은 현시점의 특정 관점에서만 추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 담론은 현실 문제 진단까지 다루기 때문에 역사적 서술보다 폭이 넓다. 제아무리 역사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한 담론일지라도 현시점의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적 담론은 현시점의 특정 관점에 부합하는 과거 사례들만 추려 내어 각색한 일종의 허구적 이야기가 아닐까?

 

역사적 서술에 바탕을 둔 담론은 현실 문제 진단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한 진단에는 현시점의 관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적 담론은 판단 주체의 경험에 의존적이다. 이 점에서 역사적 담론은 서술자 관점에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그러한 담론이 서술자 관점에서 완전히 주관적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i) 순수한 의미에서의 현시점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한 의미의 현시점이라는 것은 단지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수선(數線) 상의 점으로 표현 가능한 현시점은 실제로는 없다. 지각 경험만 하더라도, 현재라는 것은 어떤 대상에 주목하는 동안으로 파악된다. 그렇게 주목하는 동안 대상들의 변화 자체도 인식되기 때문에, 현시점이라는 것은 단순히 가까운 과거나 미래와 단절된 것이 아니다. 현재로 파악되는 동안, 어느 순간을 현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가? 지각 경험은 이 물음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대답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특성을 갖고 있다. 지각 경험을 확대해 개인의 경험으로, 개인의 경험을 확대해 집단의 경험으로 관심을 이행하는 경우에도, 현시점을 규정하는 것은 모호한 것으로 남게 된다. 사회 역사적 과정들을 다루기 위해 현시점을 특정 문제의식이나 관점과 관련시키는 것은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구분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ii) 특정 관점과 연관된 현시점을 기준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할 때, 그러한 관점은 현재를 현실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현실을 그러한 관점에 부합하는 특징들로만 구성된 사회 상태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마치 현대 사회란 오로지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만 갖는 사회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아니면 세속화된 사회란 종교성이 사라진 사회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특정 관점에 부합하는 특징들로만 구성된 현실이란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원인이 반드시 결과에 선행하는 혹은 일방향성의 선형적 인과 맥락속에 포섭될 수 없다. 현실을 공간에 비유할 때, 현실 공간에는 과거가 침투해 있다. 그 공간에는 현재의 특징들, 과거의 전통, 심지어 다른 지역 문화와의 교차 속에서 전통으로 둔갑한 것들이 뒤섞여 있다. 또한 현실 공간에 투영된 미래 지향적인 목적 및 예측 등은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를 제한한다. 물론 그러한 목적 및 예측이 미래에서 현재를 조종하는 인과적 힘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그러한 힘 개념에 바탕을 둔 인과 맥락이 사회 역사적 과정에 무조건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 공간에 뒤섞여 있는 특징들을 고려할 때, 역사적 담론을 생성하기 위한 출발점인 현시점 관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가급적 현실 공간에 뒤섞여 있는 모든 특징들의 관계를 고려하는 가운데 과거에는 없었거나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들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iii) ‘여기저기를 비교할 때, 위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관점은 여러 가지이다. 하지만 종교성 사장이라는 이념을 전제한 무신론, 즉 이념적 무신론은 위 조건을 만족할 수 없다. ‘여기저기나 현실 공간에는 과거보다 더 많은 종교들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종교는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무시될 수 없는 기능 단위인 것이다. ‘공동체에 큰 해가 되지 않는 의견이라면 누구나 내세울 수 있다는 등의 현대적 특징들은 이념적 무신론의 관점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한 특징들은 종교 교리가 사회 통합의 지배적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만을 반영해 줄 뿐, 이념적 무신론의 관점에 일방적으로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념적 무신론을 현시점의 관점으로 잡는 경우, 그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특징들은 무시되거나 현실 공간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고 만다. 현실을 왜곡시키는 이념적 무신론은 현실 공간에 뒤섞여 있는 특징들의 관계를 고려한 현시점의 관점으로 간주될 수 없다. 더욱이 이념적 무신론을 현시점의 관점으로 잡는 경우는 종교 시장 논리앞에서 무기력 해진다. 그 논리는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 공간을 빌미로 세속화 과정 자체를 허구로 돌리려는 동기를 깔고 있다.

 

무종교인의 관점, 종교도 사회의 영역들 중 하나로 기능할 뿐이라는 인식 아래 교리의 진위 유무에 무관심한 관점을 현시점의 관점으로 잡는 것은 이념적 무신론의 관점보다 세속화 담론 생성에 적합하다. 무종교인의 관점에서 현실 공간을 파악할 때, 종교 시장과 관련된 특징들은 무조건 배제되지 않는다. 현실 공간이 과거와 다른 점은 무신론자를 포함한 무종교인의 의견도 더 이상 반사회적이거나 사회에 무관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 점은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 의견이라면 누구나 내세울 수 있다는 현대적 특징에 부합한다. 또한 종교도 사회를 구성하는 영역들 중 하나로 기능할 뿐이라는 인식은 사회가 종교적 권위로부터 벗어나면서 나타난 현대적 특징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iv) 어떤 역사적 서술 혹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서술이 증거들에 의해 강하게 제한되어 있을수록, 그 서술은 서술자 관점에서 객관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 그러한 서술은 그렇지 않은 서술보다 정확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역사적 서술에 바탕을 둔 담론 역시 그러한 증거들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 공간에서 문제들을 선별하고 진단하는 역사적 담론은 역사적 서술보다 폭이 넓다. 이 때문에, 역사적 담론에 대해 직접적으로 객관적인 정도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증거들에 의해 제한된 역사적 담론을 자의적으로 구성된 허구의 이야기처럼 간주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어떤 역사적 담론이 과거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증거들을 바탕으로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거들에 의해 제한된 역사적 서술을 구성하려는 태도는 담론 생성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적 담론은 그저 주어진 현시점의 관점 아래 그 관점에 부합하는 사례들만 모아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과정들의 흔적과의 대면을 통해 지속적인 수정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어떤 X가 세속화 담론을 생성하려고 한다고 해 보자. X는 논증과 주장만 담긴 철학자들의 글을 읽고 무신론을 세속화 과정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글은 무신론으로 무장한 18세기 말 프랑스의 급진적 계몽주의자들, 진화론으로 무장한 19세기 중엽 급진주의자들, 그리고 헬름홀츠의 에너지 보존 법칙 발견으로 강화된 독일의 유물론자들을 마치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이끈 핵심 인물들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X는 계몽주의, 진화론, 유물론 등을 세속화 과정의 필연적 원인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X의 그러한 생각은 저기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도 역사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다. 세속화 과정에서 무신론자들의 기여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이로부터 무신론이나 무신론으로 무장한 계몽주의의 일부분, 진화론, 유물론 등이 세속화 과정의 핵심이었다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더욱이 무신론을 둘러싼 논쟁과 같은 것은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여기의 역사 속에는 없는 것이다. X는 과거 과정들에 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그가 원래 계획한 세속화 담론을 수정하게 된다. X가 그렇게 수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증거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담론은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v) 증거들에 의해 충분히 제한된 역사적 서술을 바탕으로 한 담론을 생성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과거를 추적하기 위해 설정한 현시점의 관점에 대해 잠정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 자신이 설정한 현 시점의 관점이 과거를 추적하는 데 부적합한 것일 수도 있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신이 설정한 현시점의 관점에 부합하는 사례들로만 구성된 역사적 서술이 정설로 둔갑할 수 있다. 그러한 사례들은 실제 역사적 과정에서 대세가 아니었거나, 대세에 대비된 예외적인 것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남는 것은 왜곡된 서술 속에 포섭될 수 없는 현실 공간의 특징들로 인한 혼란이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려면, 처음에 설정한 현시점의 관점을 수정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경우, 자신의 역사적 서술 속에 포섭되지 않는 현실 공간을 탓하게 되며, 과거나 미래에서 이상적인 현실 공간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그의 역사적 담론은 현실 문제 진단에 효과적일 수 없다.

 

역사적 서술이 증거들에 의해 강하게 제한되어 있을수록, 그 서술에 바탕을 둔 역사적 담론은 상호 주관적 의미에서 좋게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평가될 수 있는 역사적 담론은 현실 문제 진단에 효과적이어야 한다. 어떤 문제가 왜 현재 우리에게 해결되어야 할 과제인지를 명확히 해 주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의 현실 공간과 저기의 현실 공간에 유사한 특징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여기저기에 유사한 문제들만 발생하고 유사한 방법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여기저기의 역사가 동질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질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늘어나는 추세지만, 그들 다수는 여전히 저기의 맥락에서 여기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저기의 현실 공간들에 나타나는 유사한 특징들이 사회에서 기능하는 방식,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차이를 구체화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실현될 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역사를 추측하고 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의 그러한 가상의 역사를 저기의 역사와 비교할 때, ‘여기에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 실례로 무종교인의 딜레마와 같은 문제가 눈에 드러나게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른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증거들에 의해 충분히 제한된 역사적 서술에 바탕을 둔 담론은 서술자 관점에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어도, 결코 일종의 허구적 이야기와 같은 것이 아니다. 서술자 관점에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구분할 때, 그러한 역사적 담론은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은 개인적 담론이다. 상호 주관적 의미에서 고려할만한 것으로 평가받는 역사적 담론을 생성하려는 개인은 과거를 추적하기 위한 현시점의 관점을 설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신중해야 한다. 현시점의 관점은 현실 공간 속에 뒤섞여 있는 모든 특징들의 관계를 고려하는 가운데 과거에는 없었거나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들을 반영해 주면서도,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담론을 생성하려는 개인은 자신이 설정한 현시점 관점에 대해 항상 잠정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자신의 역사적 서술이 현실 공간의 지극히 일부 특징들만 포섭한다면 그 관점을 수정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생성된 역사적 담론은 현실 문제 진단에 효과적이어야 한다. 현실 문제 진단에 효과적인 역사적 담론은 여기저기의 역사가 동질화될 수 없다는 인식에 근거해야 한다. 유사한 특징들 속에서도 여기의 중요한 문제를 찾으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실현될 수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역사도 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