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후기: 독단적 지성사와 거리 두기 1

착한왕 이상하 2015. 8. 27. 22:50

* 다음 글은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후기에 해당한다. 650여 쪽의 본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힘듦을 밝혀 둔다. 

 

 

인간, 자연, 사회,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세계 이해 방식의 변천 과정을 다루는 것을 지성사라고 할 때, 여기서 펼쳐진 세속화 담론은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을 제시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것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무종교인의 관점에서 세속화 과정을 서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현실 문제를 드러내는 것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종교인이 종교적 교리들의 진위에 무관심하다고 할 때, 그는 그러한 교리들 속에 반영된 그 어떤 세계 이해 방식에도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그가 지적으로 성숙한 무종교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에게 세계 이해 방식들이란 진위 여부의 단순한 판단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특정 시대,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제한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지적으로 성숙한 무종교인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 아니라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던져 보자.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대한 물음들>

X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자신이 오랜 동안 노력을 기울여 만든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 W를 포함시키려고 한다. 기존의 세계 이해 방식들을 비판적으로 고려하여 W를 만들었기 때문에 W에 따른 생각과 행위가 올바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W는 과연 기존의 세계 이해 방식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일까? W는 과연 모든 사람이 대안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인간의 원초적 한계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위 두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인간의 한계를 다루는 것은 이 작업의 주제와 거리가 멀다. 이 때문에,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대한 두 물음>을 아주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두 물음을 여기서는 인간의 한계가 보여 주는 하나의 측면만을 밝혀 간략히 다룰 이다. 그 측면은 다음과 같다.

 

<경험할 수 없는 전제들>

모든 세계 이해 방식들에는 특정 전제들이 깔려 있다. 삶의 경험 속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전제에 대한 직접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 X가 삶의 특정 경험을 통해 세계 이해 방식 W1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다른 Y는 유사한 경험을 통해 W2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또한 X 혹은 YW1 혹은 W2를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 각자의 경험만으로는 충분히 확보될 수 없다. 그 이유는 W1 혹은 W2가 각자 만족할 수 있도록 그들의 경험을 해석해 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의 전제들을 받아들이도록 해 주는 직접적 증거들을 경험 속에서 찾겠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 이해 방식들에 깔려 있는 전제들은 인간의 한계가 갖는 한 측면을 반영해 준다.

 

<경험할 수 없는 전제들>에서 언급된 경험은 지각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각 경험뿐만 아니라 실재하거나 의도된 대상들에 대해 갖는 느낌을 포함한 의식적 활동 전체를 일컫는다.

 

생략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은 대상 지각, 규정을 포함한 모든 것이 마음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세계 이해 방식을 철학적 이론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지각 경험을 그저 감각적 수용성, 즉 외부 자극에 의해 마음이라는 실체가 동요된 초기 상태로 규정하고, 감각적 수용성과 이해력을 이분시켰다. 그러한 수용성과 이해력의 합성 속에서 확실한 지식 체계를 이끌어 내는 것을 칸트 철학의 목적 중 하나라고 할 때,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는 자신의 세계 이해 방식을 경험만을 바탕으로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대상 지각, 규정을 포함한 모든 것이 마음에 의존적이라면, 마음 자체는 경험의 산물이 될 수 없다. 또한 마음뿐만 아니라 마음과 물질을 창조한 것으로 가정된 신도 경험적 증명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을 증명 대상으로 삼는 것은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경험을 가능하도록 해 주는 선험적 조건들로부터 확실한 지식 체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경험 이전의 마음, 물질, 신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 태도임을 항변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한 전제는 경험에 의해 뒷받침될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새로운 전제를 요구한다. 그것은 뉴턴 역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이 불변의 확실한 지식 체계라는 것이다. 후자의 전제 없이 전자의 전제는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경험에 의해 뒷받침될 수 없는 전자의 전제, 경험을 가능하도록 해 주는 선험적 조건들이 있다는 전제 자체만으로는 그러한 조건들을 무엇으로 설정할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철학이 새롭다고 할 때, 그것은 얼마나 새로운 것일까? 그 방식의 새로움은 방법론적 측면에 있다. 칸트는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할만한 지식을 전통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과학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과학의 지식을 단순히 확실한 지식 체계의 표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방식을 제한하는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등 기존의 과학 및 수학의 지식 체계를 위협하는 일련의 발견이 이루어진 이후, 서양 철학 흐름의 한 축은 칸트의 방법론적 새로움에 대한 지적 반응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대한 물음들>과 관련시켜 진지한 철학적 담론 주제로 삼은 시도는 거의 없었다. 그러한 시도는 이 작업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있다. 특정 시대의 상황에 철학자들이 반응할 때, 지금까지의 철학은 그러한 반응 방식을 숨기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 그러한 반응 방식을 숨긴 채 반응 결과인 입장만을 보편적으로 정당함을 보이려 했다는 것이다.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은 혁명적이라고 불리지만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 이해 방식이다.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은 과거 전통, 특히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과 얼마나 단절된 것일까?

 

대상 지각 및 규정을 포함한 경험의 모든 측면을 마음과 연관시키는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은 고대에도 있었으며,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에 매우 순응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뉴튼 역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불변의 확실한 지식 체계로 전제하는 그의 세계 이해 방식에는 법칙 부과설이 전제되어 있다. 신이 우주를 합법칙적으로 창조했다는 법칙 부과설은 외부 창조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작용인으로 파악하는 경우, 만유내재론에 대비된 외부 창조설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이다. 합법칙적 우주를 부정할 수 없는 한, 칸트에게 창조주로서의 신 존재 가정은 합리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법칙을 신의 명령으로 환원시키는 중세 전통을 계승한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 스코터스(D. Scotus), 오캄(W. Ockaham) 등이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던 그러한 전통에 따르면, 자연 법칙을 포함한 모든 법칙은 창조물 각각이 본성에 순응해 따라야만 하는 신의 규칙인 것이다.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이 기독교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사후 구원에 대한 그의 입장에 잘 드러나 있다. 칸트에게 사후 구원은 도덕적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합리적 능력 자체가 요청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도덕성은 합리적 능력과 단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도덕성을 합리적 능력 반경 내에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도덕적 행위는 합리적 행위이다. 두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근거가 도덕적이라면, 그 근거는 합리적인 것이며, 선택한 것은 따라야만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칸트에게 도덕적인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 도덕성을 접근할 때, 모든 사람은 도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최선(最善)의 상태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한 최선의 상태는 현세에 실현될 수 없다. 하지만 합리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현되기를 원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삶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가능한 사후 세계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만약 사후 세계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칸트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로 인해 사람들의 도덕성은 경감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제 다음 물음을 던져 보자.

 

대상 지각 및 규정을 포함한 경험의 모든 측면을 마음과 연관시키는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은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에 매우 순응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은 그저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을 계승한 것일까?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이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에 순응적이라고 해도. 위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칸트는 자신의 세계 이해 방식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외부 창조설, 사후 구원 등 기독교 세계 이해 방식의 핵심을 전제하지 않았다. 그러한 핵심은 자신의 철학에서 합리적으로 요청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살았던 시대를 고려한다면, ‘계몽주의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인물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전제한 철학적 체계를 세울 리 만무하다. 이 점은 그가 지상계와 천상계, 인간적인 것과 신성적인 것, 평신도와 성직자를 이분하는 세 관점으로 구성된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가 가속되었던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의 핵심은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의 사장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이 변화하는 세태에 맞추어 적응하고 재해석되는 과정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외부 창조설, 사후 구원이라는 기독교 세계 이해 방식의 핵심 전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 세계 이해 방식은 여러 하부 세계 이해 방식들을 갖게 된다. 기독교에 밀려 묻혀 있던 세계 이해 방식들이 새로운 세태에 맞추어 부활하거나, 원자론처럼 기독교와 적대적 관계를 맺었던 세계 이해 방식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또한 여러 세계 이해 방식들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들도 생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세가 된 현재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은 다음의 특징을 갖는다.

 

외부 창조설, 사후 구원 등의 전제를 바탕으로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현재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그 세계 이해 방식과 다른 것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무조건 배척하는 사고방식도 허용되지 않는다.

 

현재 이 땅의 개신교 교회 세력은 위 특징에 반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점은 이 땅의 개신교 교회 세력의 성격을 기독교인 우월주의’, ‘기독교 중심사관’, ‘문화적 간섭주의로 구성된 백색 도덕 제국주의의 토착화로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 진다.

 

 

덧글 1. 칸트 이후의 서양 철학의 한 흐름

일부는 경험 이전의 선험적 조건들을 가정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수정하고, 과학의 발달 역사에서 확실한 지식 체계의 이상적인 구성 방식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한 구성 방식이 설정되면, 과학의 역사는 그러한 구성 방식을 향하는 수렴의 역사로 가정되곤 했다. 이러한 생각은 독일 신칸트학파의 카시러(E. Cassirer)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카시러에 따르면, 이상적인 과학의 지식 체계는 현상의 기능적 설명에 충분한 상징 기호 체계로서 실재에 대한 존재론과 무관하다. 이 점은 그의 다음 책에 잘 나타나 있다. Cassirer, E.(1910), Substanzbegriff und Funktionsbegriff: Untersuchungen ueber die Grundlagen der Erkenntniskritik. 카시러의 세계 이해 방식은 모든 것이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칸트의 세계 이해 방식과 대동소이하다. 카시러의 철학은 다만 당시 새로운 과학을 수용할 수 있도록 카트의 철학을 수정 확정한 것이다. 칸트와 카시러의 세계 이해 방식에 맞서 물 자체(thing in itself)를 알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유물론적 세계 이해 방식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기존의 지식 체계와 새로운 지식 체계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과학의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도 있었다. 그러한 입장은 멀리는 바슐라르(C. Bachelard), 캉길렘(G. Canguilhem) 등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일상성을 왜곡시키는 과학 지식 체계의 성격 및 한계를 부각시키고, 철학이 그 한계를 보완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그러한 입장은 베르그송(H. Bergson), 후설(E. Husserl), 하이데거(M. Heidegger)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촉진시킨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주로 도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부정적으로 비판한 입장도 있었다. 그러한 입장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덧글 2.  칸트 사후 구원론 관련 보충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스피노자를 예로 들어 이 점을 강조한다. 칸트는 스피노자를 도덕적이지만 사후 세계를 부정한 인물로 상정한다. 그러한 인물은 결국 기아, 궁핍, 질병, 죽음이라는 악에 처하게 될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