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후기: 첫 번째 종류의 독단적 지성사

착한왕 이상하 2015. 10. 22. 22:44

* 다음 글은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후기에 해당한다. 650여 쪽의 본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힘듦을 밝혀 둔다. 

 

 

독단적 지성사란 세계 이해 방식들의 복잡하고 역동적 거래 관계의 흐름을 숨겨 버리는 역사 서술 방식을 일컫는다. 그러한 첫 번째 역사 서술 방식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두 세계 이해 방식 W1, W2를 골라내어 둘 사이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 맥락 속에 내용적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이때 W1, W2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은 누락된다. 이와 함께 그러한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인공 환경의 물질적 조건의 변동, 전쟁 및 자연 재해, 그리고 사회 구조의 변동 맥락 등도 누락되기 쉽다. 지나치게 대립적 관계 맥락 속에 내용적으로 고정된 W1, W2가 선후 관계를 맺는 경우, W2W1을 대체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는 그러한 대체의 관점이 사전에 전제된 경우가 많다.

 

첫 번째 방식의 독단적 지성사는 주로 인물 중심으로 서술되곤 한다. 과거의 특정 사상과의 결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인물들의 입장을 배열하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 방식의 서술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물 중심의 첫 번째 서술 방식으로 특정 시대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시대를 과거와의 단절 맥락 속에 가두어 버리는 지성사를 들 수 있다. 실례로 베이컨, 데카르트 등의 일부 저술만 가지고 근대를 논한 지성사를 본 사람에게는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 규정하기 위해 전통과의 결별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고대 및 중세의 원자론뿐만 아니라 원자론에 반대했던 로저 베이컨(R. Bacon)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던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가혹하게 비판한 동기는 단순하다. 그러한 주의로 정당화되었던 과거의 제도들이 자신의 개혁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의 영혼론 등에 배어 있는 중세의 영향력을 안다면, 데카르트의 일부 글만 가지고 근대를 과거와 단절시키는 것은 역사적 날조에 가깝다. 그렇다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베이컨이나 데카르트의 생각이 중세 사상을 답습한 것도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새로운 시대의 독자성은 결코 과거와의 단절 논리 속에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독자성은 단지 과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성향들만으로도 확보 가능한 것이며, 과거의 것들을 변형하여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이 생성되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첫 번째 방식의 독단적 지성사에 따른 세속화 서술 방식은 기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이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는 식의 서술 방식이다. 실례로 세속화 과정은 종교성이 사장되는 과정이라는 서술 방식을 들 수 있다. 그러한 서술 방식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는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을 종교성에 대비된 합리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이 기존의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때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마저 흡수해야 한다. 이를 인정하면, 현실을 세속화된 사회 상태로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종교성이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으로 대체된 사회 상태란 인류 역사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학의 분과 다양성 및 여러 상이한 방법론들을 고려할 때, ‘하나의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것도 애매모호해 진다.

 

만약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것이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정에 초자연적인 것을 개입시키지 않겠다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뜻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세계 이해에 대해 중립적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것이 배어 있는 과학적 생활양식은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것이 과학의 역사에서 시대 별로 유행했던 기계론, 유기체론, 전일론과 같은 것을 뜻한다면, 일련의 질문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 중 무엇이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을 대표하는가? 아니면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것은 그것들에 공통된 어떤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묻는다는 점에서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 기계론, 유기체론, 전일론 중 어떤 것인 X를 신봉하는 과학자가 가설을 세울 때, 기계론은 그의 가설 생성 과정에 개입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X를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이론은 X와 내용적으로 마찰할 수 있으며, X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도 해석 가능하다. 가설 생성 과정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세계 이해 방식들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며,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 특정 시대에 대세였던 이유는 측정 도구의 한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더욱이 기계론, 유기체론, 전일론과 같은 것들은 특정 종교의 세계 이해 방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은 뉴턴 역학과 기계론의 연관성에 대한 간략한 언급만으로도 알 수 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게 된 기계론을 정확히 규정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뉴턴 역학과 관련해서는 다섯 가지만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첫째, 모든 현상은 부분들의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며, 그러한 부분들의 기본 단위가 있다. 따라서 모든 전체적 현상은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부분들의 기본 단위의 속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셋째, 그러한 속성은 물질량과 운동이다. 넷째, 운동의 변화는 오로지 기본 단위들의 접촉 및 충돌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때문에, 물질의 활성이나 물체 사이의 원거리 작용과 같은 것은 기계론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는 부정된다. 다섯째, 그러한 운동의 변화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보편적 법칙들에 따른 것이다. 모든 현상을 발생시키는 부분들의 기본 단위는 뉴턴에게는 동질적 물질로 구성된 입자들이며, 그의 운동 법칙들은 입자들의 접촉 및 충돌에 따른 변화를 설명해 주는 체계이다.

 

뉴턴은 자신의 운동 법칙들을 신의 우주 설계 도식처럼 여겼다. 그는 운동 법칙들로부터 중력 현상을 설명해 내려고 했다. , 그는 표면적으로 원거리 작용으로 나타나는 중력 현상이 사실은 입자들의 운동 변화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따라서 운동 법칙들과 중력 법칙으로 구성된 뉴턴 역학은 기계론의 세계 이해 방식을 따를 때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기계론은 뉴턴의 운동 법칙들을 발견하는 데 깊숙이 개입해 있지만, 뉴턴 역학 자체가 기계론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뉴턴 역학 자체는 기계론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18세기를 거쳐 뉴턴 역학이 프랑스 등지에서 득세 했을 때, 뉴턴의 절대 공간 개념을 비판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을 뉴턴 역학과 중재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기계론이 뉴턴 당시 큰 영향을 미쳤던 이유 중 하나는 물질의 활성 등 자연의 비선형적 측면을 측정할 수 없었던 한계였다. 이 점은 과학적 발견에서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한계가 갖는 인식되는 과정이 자연의 여러 측면을 측정할 수 있게 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과학적 생활양식이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기계론, 유기체론, 전일론 등이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을 대표할 수 없다. 이때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은 그러한 생활양식에 내재한 방법론적 자연주의로 귀결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방법론적 자연주의 역시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다는 과학적 생활양식의 성격으로 인해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을 배제시킬 수 없다. 과학적 세계 이해 방식을 종교성에 대비된 합리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전자가 후자를 대체한다는 방식의 서술은 첫 번째 방식의 독단적 지성사에 따른 것일 뿐이다. 더욱이 그러한 독단적 지성사는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을, 그리고 기독교가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전체 신도 수가 과거보다 오히려 늘어났다는 현실을 빌미로 세속화 과정을 허구로 돌리려는 시도를 정당화해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러한 독단적 지성사는 특정 종교적 교리가 더 이상 사회를 지배할 수 없게 된 사실마저도 부정하도록 만드는 논리에 힘을 실어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