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후기: 두 번째 종류의 독단적 지성사(E. von 라조)

착한왕 이상하 2015. 10. 30. 19:39

* 다음 글은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후기에 해당한다. 650여 쪽의 본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힘듦을 밝혀 둔다. 

 

 

두 번째 서술 방식의 독단적 지성사는 지나칠 정도로 세계 이해 방식들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두 번째 서술 방식은 좁은 의미넓은 의미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좁은 의미의 두 번째 서술 방식의 독단적 지성사는 다음과 같다.

 

두 세계 이해 방식 W1, W2를 골라내어 주제 및 사고방식의 측면에서 둘 사이의 유사성을 과장한 맥락 속에 고정시켜 버린다. 그렇게 고정된 W1, W2가 선후 관계를 맺는 경우, W2W1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된다.

 

위 두 번째 서술 방식의 독단적 지성사는 첫 번째 방식에 대비되는 까닭에, 첫 번째 방식에 대한 일반적 비판은 두 번째 방식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실례로 W1, W2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은 주목되지 않으며, 이와 함께 그러한 변화에 결정적일 수도 있는 인공 환경의 물질적 조건의 변동, 전쟁 및 재난, 사회 구조의 변동 맥락 등이 누락되기 쉽다. 이러한 독단적 지성사에 따른 세속화 서술 방식은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을 빌미로 세속화 과정 자체를 사소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규정하는 방식은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의 개념적 뿌리가 기독교에 있다는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에 기대고 있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이 논리적,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으로 성립할 수 없음은 자세히 논했다.

 

두 번째 서술 방식에 따른 독단적 지성사를 넓은 의미에서 접근하는 경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주제의 측면에서 유사한 세계 이해 방식들 W1, W2, ..., Wn을 선별한다. W1, W2, ..., Wn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고, 그러한 주제가 현재에도 보편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 인류 역사는 {W1, W2, ..., Wn}에 기원을 둔 것이다. 이때 역사는 W1, W2, ..., Wn을 기준으로 전()과 후()시기로 나뉘게 되며, 오로지 후시기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류 역사로 간주된다. 더욱이 W1, W2, ..., Wn들에 함축된 주제들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당위적 가치로 규정되기 때문에, 그 세계 이해 방식들에서 벗어난 역사는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역사에 대한 위 두 번째 서술 방식이 앞서 살펴본 것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접근 방식임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 보편 역사관을 통해 알 수 있다. 기독교 세계 이해 방식의 핵심 주제인 사후 구원, 사후 구원론에 함축된 초월적 세계, 신 앞에 평등 등이 보편적 진리, 윤리, 인권의 기원이라는 서술은 좁은 의미의 두 번째 서술 방식에 해당한다. 물론 그러한 서술 방식에는 보편적 진리, 윤리, 인권 등이 현재에 보편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반면에 그러한 주제들이 세계화된 모든 종교들에 공통된 것이며, 인류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라는 서술은 넓은 의미의 두 번째 서술 방식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실례로 룩셈부르크 출신 독일 철학자 라조(E. von Lasulx)의 역사 서술 방식을 들 수 있다.

 

신학과 역사를 통합해 보려는 시도는 라조가 활동했던 19세기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라조는 그러한 시도를 재정립하려 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물론 그렇게 재정립하는 방식은 신학을 기초로 한 역사 서술 방식이 될 수 없었다. 17세기에나 통용된 그러한 방식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라조는 역으로 역사적 증거에 근거해 신학을 다루는 방식을 택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을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종교를 포괄적 의미에서 이해했다. , 모든 종교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주목한 것이다.

 

라조는 인류의 역사를 종교의 발달 역사로 파악하고 종교의 발달 과정을 유기체의 성장 과정에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유기체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력이 약해지는 퇴화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른다. 죽음에 다가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신 존재에 대해 의심하거나, 아예 신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구원의 계시를 알아챈다. 구원의 계시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매개하지 않고 신과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된다. 유기체의 성장 과정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계시를 담지 못한 종교는 쇠퇴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라조에게 세속화란 그러한 종교들의 소멸 과정이자 동시에 새로운 종교들이 탄생하는 밑거름이다. 그러한 새로운 종교들은 구원의 계시를 담고 있어야 한다. 자연을 매개하지 않고 인간이 신적인 것과 직접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 즉 구원의 계시에 함축된 생각이 세계 전체에 걸쳐 나타난 현상에 라조는 주목한다. 그러한 생각을 기독교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인도의 불교, 중국의 유교, 유대교, 심지어 그리스의 플라톤, 독일의 칸트 등 철학자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계시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모든 종교와 철학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 없다고 라조는 주장한다. 그것은 그에게 인간 본성의 근원에 대한 발견이며 인류 역사의 기원인 것이다.

 

라조의 보편적 역사 서술 방식은 기독교 중심 사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점에서 당시 저기에서는 주목받을 만하다. 또한 구원 등을 보편적 인류애와 연관시키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라조의 생각은 여전히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 장의 전반부에서 살펴본 역사의 비동질성을 받아들인다면, 라조의 보편적 인류 역사 서술 방식은 그저 철학자의 신화 창조에 불과하다. 그러한 신화 창조는 현재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축의 시대(axial age) 가정에 근거한 보편적 역사 서술 방식이다. 철학과 비교 사회학 등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그러한 역사 서술 방식 역시 철학적 신화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이 작업에서 부정된 도덕의 종교 기원론으로 귀결된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덧글

Lasaulx, von E.(1856), Neuer Versuch einer alten auf die Wahrheit der Tatsachen gegruendeten Philosophie der Geschichte. 독일은 19세기에도 구교 대 신교의 갈등이 다른 지역보다 심했다. 라조는 당시 보수 진영으로 분류되는 구교 전통에서 성장했다. 가톨릭 교리에 정통한 그는 그리스 및 근동 지역을 여행하면서 고대 그리스 및 유대교의 요소들을 융합한 종교로 기독교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구원의 계시를 밝힌 인물들로 예수뿐만 아니라 붓다, 조로아스터, 심지어 칸트, 괴테, 모차르트 등을 언급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다른 종교에도 함축되어 있으며, 종교적 권위가 사라진 이후에도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가톨릭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책은 사후에 금서 목록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