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후기: 두 번째 종류의 독단적 지성사(축의 시대 1)

착한왕 이상하 2015. 11. 18. 01:42

* 다음 글은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후기에 해당한다. 650여 쪽의 본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힘듦을 밝혀 둔다. 

 

축의 시대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인물은 야스퍼스(K. Jaspers)이다.축의 시대란 서기전 500년 이후 여러 문명권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현실 초월성을 발견한 시대를 일컫는다. 그러한 현실 초월성은 종교적 측면에서는 사회적 전통 및 자연의 매개로 신적인 것과 접촉하는 세계 이해 방식에서의 탈피를 의미한다. 이때 인간은 신적인 것과 직접적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되며 구원의 대상이 된다. ‘현실 초월성은 철학적 측면에서는 상황과 무관한 초월적 혹은 보편적 진리를 뜻한다. 종교적, 철학적 측면에서의 현실 초월성진정한 개인 개념을 함축한다. 여기서 진정한 개인이란 사회적 전통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며, 보편적 당위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개인이다. 이러한 세 측면을 갖는 현실 초월성은 야스퍼스에게는 축성(axiality)’, 즉 축의 시대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종교 및 사상들에 내재된 공통 속성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라 축의 시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경우, ‘축의 시대는 결코 시대를 논하기 위한 분석적 도구(analytical tool)’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 초월성이라는 축성을 기준으로 축의 시대 이후만을 진정한 인류의 역사로 규정하는 규범성을 갖는다. 따라서 인류 역사란 그저 축의 시대에 나타난 세계 이해 방식들의 축성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되거나 실현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때 현실 초월성이라는 축성이 약화되는 시대는 인류 역사의 쇠퇴기로 규정되어버리고 만다.

 

축의 시대와 축성을 가정하여 인류 역사를 논하는 것은 철학적 신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이 작업의 논의에 따를 때 그렇다. 이를 분명히 하려면,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를 가정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동기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야스퍼스는 식민지주의 팽창에서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인류사적 위기로 규정했다. 그에게 그 시기는 17세기 혹은 16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 근대의 계획이 실패로 종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근대의 계획은 집단 및 전통보다는 합리적 개인을 중시하지만, 실제 개인들은 근대의 또 다른 탄생물인 국가에 종속된 개인들이다. 국가에 종속된 개인들은 비판적 성찰 없이 권력의 입김에 휘둘려 평등의 관점을 상실한 채 다른 지역의 식민지화에 찬성했고, 급기야 세계 대전이 발생하고 말았다. 현실 초월성을 인식한 개인만이 그러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개인이며, 그러한 진정한 개인은 이미 서기전 500년 이후 붓다, 유대 예언자들, 조로아스터, 공자, 노자, 플라톤 등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당시 만연했던 유럽 중심사관에서 탈피해 인류의 역사를 고찰해 보겠다는 야스퍼스의 의도가 깔려 있다.

 

유럽 중심 사관에서 탈피해 보려는 야스퍼스의 의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의 철학 체계는 다음의 이유에서 자신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한다.

 

(i) ‘현실 초월성이라는 축성을 가정하여 인류 역사를 축의 시대 이전과 이후로 이분하는 것은 증거를 결여한 허구에 가깝다.

 

(ii)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나는 과정에 대한 야스퍼스의 서술 방식은 너무나 단선적이며, 그의 의도와 달리 여전히 유럽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iii) 축의 시대의 축성 가정에 근거해 지역 간 혹은 문명 간 상호 이해를 강조하는 것은 유치한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함축하며, 현실 문제 진단에 무기력하다.

 

(i)과 관련해 야스퍼스는 라조와 마찬가지로 공자, 노자, 유대 예언자들, 붓다, 플라톤 등의 인물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한 인물들에 근거한 역사 서술 방식은 영웅 중심의 서사 구조 방식이며, 이때 그러한 인물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라조와 야스퍼스는 그러한 인물들이 여러 문명권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나왔고 유사한 세계 이해 방식을 공유했다는 것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간주한다. 도교(道敎)()’, 신유학의 ()’ 개념 등이 과연 초자연적 신이나 플라톤의 형상 개념과 함께 현실 초월성의 범주로 묶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동양과 서양의 세계 이해 방식들을 지나치게 유사성과 차이성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논했다. 논의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의심은 논외로 하고, 일단 축의 시대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자. 그러나 종교, 사상들이 나타난 생성 과정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 그것들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경우, 축의 시대는 신비로운 것이다. 라조와 야스퍼스는 그러한 신비로움을 우연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그 속에서 인류의 보편적 근원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야스퍼스에게 그 근원은 현실 초월성이라는 축성이며, 축의 시대 이전의 역사는 진정한 인류의 역사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 점은 너무나 독단적이다.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아 축의 시대 이전의 종교와 사상을 주술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주술적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 상태에서는 제의(ritual)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며, 현실 초월적인 것은 인간과 직접적 동반자 관계를 맺지 않는다. 현실 초월적인 것은 인공물이나 자연물의 매개를 통해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제의는 그러한 매개를 실현시키는 수단이다. 주술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을 근거로 야스퍼스는 현실 초월성진정한 개인을 연결시킨다. 현실 초월성을 인식한 개인만이 전통 및 집단 현상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주술성을 벗어나 집단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비판적인 개인은 현실 초월성을 인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기술 문명 확대 과정은 현실 초월성에 대한 신념 혹은 신앙을 약화시켰고, 그러한 신념 및 신앙을 잃어버린 상태를 정당화해 주는 개인주의는 사회에 긍정적일 수 없다. 하지만 주술적 종교가 지배한 축의 시대 이전의 사회 상태가 이후보다 야만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문명, 합리성 등은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없는, 즉 특정 기준에 따라 정의되는 것인 까닭에, 이 물음은 축의 시대 이후의 사회 상태에서 발견되는 성향을 문명적인 것 혹은 합리적인 것으로 전제할 때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전제를 당연시 여기는 사람은 축의 시대 이전의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의 문명을 지배층 대 노예층으로 이원화시키고, 전자에 채찍이라는 상징성을, 후자에 일하는 기계라는 싱징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축의 시대 이전의 문명을 그렇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문헌학적, 고고학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다.

 

축의 시대 이전이나 이후에도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당연시 여기는 사회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았다. 민주제에 국한해 논할 때, 사람들이 그러한 자유를 개인 각자와 연결시키는 사고방식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전히 실현되지 않은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사람들이 당연시 여기게 된 과정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이며, ‘개인에 대한 특정 보편적 관점을 전제하지 않는다.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에 걸쳐 개인이 자신의 의견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행위하려고 하게 된 사회 상태가 현실 초월성이라는 축성을 전제해야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축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개인이란 사회에 무비판적이라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그 어떤 세계 이해 방식에도 종속되길 거부하는 무종교인은 그러한 개인을 대표한다. 특히 문제의 공유를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지적인 무종교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들의 유사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진단에 필요한 현명한 상황 판단 능력이며, 세계 이해 방식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열린 태도인 것이다. 더욱이 개인의 비판적 성향이 공동체적 가치와 배타적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축의 시대 이전의 사회 상태가 주술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 할 때, 이는 공동체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중시되었던 상태임을 뜻한다. 사람들은 주술적 제의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제의는 사회 참여의 고대 방식이다. 이로부터 축의 시대 이전의 사회는 개인의 비판적 태도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던 사회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축의 시대 이전의 사회에서도 개혁을 시도한 권력가들이 있었으며, 독재적 권력에 맞선 민중 저항 운동도 있었다. 공동체적 가치가 중시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권력층에 요구되는 덕()도 엄격했다. 더욱이 축의 시대에 나타난 세계 이해 방식들에만 공통된 축성으로 현실 초월성을 규정할 수 없다. 그러한 초월성 개념은 축의 시대 이전 문명에서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 초월성을 함축한 사후 구원 개념은 기독교 등 축의 시대 이후 종교뿐만 아니라 이전의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머리말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이집트인들의 세계 이해 방식 속에서도 구체화되어 나타나 있다. 기독교의 경우, 성경 문구의 애매모호함과 중의성으로 인해 사후 구원의 대상이 영혼, 육체, 의식 중 무엇인지는 항상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 중 무엇이 구원의 대상인지가 결정되는 방식은 시대의 변동 맥락에 의존적이었다. 반면 이집트의 사후 구원론은 주석과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집트 종교가 오히려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약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집트의 중요 신들은 주술을 통해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는 정령과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그러한 신들은 사후 심판을 주관하는 초월적 존재들이다. 파라오든 노예든 모두 신 앞에 평등하며, 심판의 기준을 기록한 문헌에서 문화적 차이를 벗어나 그 기준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이집트인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현실 초월성이라는 축성을 가정하여 축의 시대 이전과 이후를 이분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축의 시대 이후의 사회 상태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공동체적 생활양식이 두드러졌고, 주술성의 역할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축의 시대 이후에도 무종교인이나 무신론자는 여전히 사회에 무관심하거나 사회에 반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축의 시대 이후의 사회 상태는 다만 주술성이라는 성향이 약화된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제의를 기록하는 기능에서 벗어난 텍스트의 역할, 실례로 사회 통합 이념을 담은 종교서 및 사상서의 역할, 단일 제의만으로는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수 없게 된 사회의 상태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러한 원인들을 고려할 때, 축의 시대에 나타난 세계 이해 방식들은 결코 위대한 인물들의 유산이 아니다. 그들의 역할도 당시 변화하는 사회 상태에 대한 지적 반응의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축의 시대가 생성된 과정은 설명하기 어려울 뿐,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담론을 위한 편의상 기준 혹은 분석 도구로 축의 시대를 설정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축성을 가정하여 인류 역사를 축의 시대 이전과 이후로 이분하는 것은 통용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