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 후기: 두 번째 종류의 독단적 지성사(축의 시대 2)

착한왕 이상하 2015. 11. 23. 23:45

* 다음 글은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의 후기에 해당한다. 650여 쪽의 본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힘듦을 밝혀 둔다. 

 

유럽 중심 사관에서 탈피해 보려는 야스퍼스의 의도와 자신의 철학 체계 사이의 긴장감을 보여 주는 두 번째 이유로 다음을 언급했었다

 

(ii)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나는 과정에 대한 야스퍼스의 서술 방식은 너무나 단선적이어서 현실 문제 진단에 무기력하다.

 

야스퍼스는 16세기 말에서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한 시기까지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여느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근거해 자연과 도덕의 보편적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대의 계획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의 계획이 기술 문명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현실 초월성에 근거한 진정한 개인의 의미가 퇴색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근대의 계획이라는 가정을 받아 들여도, 그 계획의 촉진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너무나 단선적이다. 이 작업의 논의에 따르는 경우, 꽤나 복잡한 그 촉진 과정은 유럽 사회의 시대적 변동 맥락과 맞물려 있어 획일적으로 서술될 수 없다. 현시점에서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그 촉진 과정은 여러 측면에서 서술 가능하다.

 

근대의 계획이 촉진되는 과정은 지성사적 측면에서는 지동설에 대한 세 가지 반응, 즉 진보론, 종말론, 회의론이 이성과 신앙의 분리라는 맥락 속에 중재되면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긴장 관계를 낳고 백색 도덕 제국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이다. 두 세계 대전을 거쳐 유럽 중심 사관을 반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에 힘입어 새로운 담론을 구축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야스퍼스는 그러한 시도를 한 인물들 중 한 명이다. 근대의 계획이 촉진되는 과정은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는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의 갈등을 거쳐 정치가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구축되는 과정이다. 그러한 신념 아래 시도된 여러 정치적 실험 과정에서 나타난 민주제가 제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각지로 확대되었다. 근대의 계획이 촉진되는 과정은 세속화의 측면에서는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여러 측면에서 서술 가능한 과정을 야스퍼스는 진정한 개인의 의미가 퇴색되는 과정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인류 역사를 지나치게 목적론적이고 진보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당시 분위기에 대한 야스퍼스의 반감이 도사리고 있다.

 

근대의 계획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그것의 촉진 과정에 대한 야스퍼스의 비관적 입장을 P라고 하자. P에 대비된 목적론적이고 진보적 관점을 Q라고 하자. PQ는 반대 관계를 맺기 때문에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Q를 부정하여 P를 정당화하거나, P를 부정하여 Q를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논증의 전제인 ‘P 또는 Q’가 정말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 PQ가 반대 관계를 맺는다고, 그 둘이 반드시 동시에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는 모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정에 대한 비관적 입장이 거짓이라고 해서 그것에 반하는 낙관적 입장이 반드시 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Q는 동시에 거짓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때 PQ도 아닌 것이 실제로는 참이거나 사실일 수 있다. 야스퍼스는 Q를 부정하여 유럽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으로부터 P, 즉 근대의 계획이 촉진되는 과정을 진정한 개인의 의미가 퇴색되는 과정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야스퍼스가 비관적으로 평가한 과정은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 실례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추론 및 추상화 과정 등의 합리적 능력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 의견은 누구나 주장할 수 있다는 것등이 나타나는 과정을 논할 때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경우, 그러한 특징들은 현실 초월성을 전제할 때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 현실 초월성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의 그러한 특징들은 단지 현실의 부정적 측면에 대비되어 긍정적으로 평가될 뿐,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살아 있어 테러의 세계화 현상등에 근거해 지금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그 원인은 결코 현실 초월성에 대한 신앙의 회복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은 지역 간 힘 균형 관계의 변동’, ‘특정 종교 내부의 종파 간 갈등’,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 ‘특정 지역의 정체성은 전통으로의 극단적 회귀를 통해서만 유지 가능하다는 입장의 득세등과 맞물려 평가되어야 한다. 그 원인을 문명 대 야만 혹은 합리적인 집단 대 특정 종교의 광신도 집단 사이의 대결 구도 맥락으로 단순화시키는 경우, 그 맥락은 기독교 대 이슬람의 갈등으로 좁혀질 여지가 있다. 두 종교 모두 창조주로 가정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보다 강한 의미의 현실 초월성을 띠고 있다. 테러의 세계화 현상을 그러한 두 종교의 갈등 탓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야스퍼스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두 종교의 참다운 교리를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전통 및 제의와 결합하여 지역문화적 분리를 강화시키는 교리의 정치적 기능으로 인해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그러한 초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러의 세계화 현상에 대한 이러한 반응은 제아무리 지적으로 포장되어도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데 무기력한 것이다.

 

근대의 계획이 촉진되는 과정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야스퍼스의 시각에 동조하는 실존주의자들은 기술 문명 역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들의 평가에 따르면, 근대의 계획이 촉진되는 과정의 핵심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술 문명의 확대 과정이다. 그러한 기술 문명의 확대 과정애서 현실 초월성을 전제한 참다운 개인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개인들은 무비판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무비판적인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갖게 되어 국가 권력의 기능 방식에도 무관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원을 놓고 벌어진 국가 간 경쟁은 식민지 팽창주의와 세계 대전을 낳았다는 것이다. 기술 문명의 확대가 이렇게 만든 핵심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정치 체제, 힘의 균형 관계, 인공 환경 및 삶의 변동 맥락 속에서 기능하는 다양한 기술의 측면들을 무시한 것이다. 기술이 현실 초월성 개념과 결합하는 방식의 맥락은 논리적으로 배제 되지 않으며, 그러한 맥락이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요구되는 개인 개념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어떤 철학적 규정 방식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조화로운 사회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 조건들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의로 족하다.

 

 

* 야스퍼스의 철학적 오류에 관한 간략한 언급

 이 꽃은 노랗다이 꽃은 파랗다는 서로 반대 관계를 맺는다. 전자와 후자는 동시에 참일 수 없지만 동시에 거짓일 수는 있다. 전자가 거짓이라는 사실로부터 후자가 반드시 참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와 후자의 이러한 반대 관계는 전통적 대당 사각형(traditional square root)의 대반대 관계, 모든 FG그 어떤 FG가 아니다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두 진술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할 때, 그 둘의 관계는 모순 혹은 반대 관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