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점들의 간격과 위치 3. 자연 신학, 창조적 진화론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1. 30. 03:40

(3) 자연 신학, 창조적 진화론, 그리고 라마르크에 대한 왜곡

만약 라마르크의 생명나무가지 도식이 존재 사슬의 전개 방식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면,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목적론’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 즉, 생물계의 진화는 신이 예정한 목적을 향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지적 설계자 가정에 바탕을 둔 자연 신학 전통에 흡수될 수 있다. 그러나 지적 설계론이 ‘약한 의미의 자율적 우주 창조설’을 대표하는 까닭에, 다음의 문제가 발생한다.

 

• 신의 설계도에 비유되는 존재 사슬을 실재하는 것으로 전개시켜주는 자연적 원인은 무엇인가?

 

신이 진화의 경로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면, 환경의 점진적 변화가 변이의 원천이어야 한다. 이러한 대답에 따른다면, 환경은 진화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용한다. 즉, 환경의 점진적 변화는 존재 사슬의 특정 계층에 대응되는 종이 다음 단계의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논증적으로 처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 신학 전통에 따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

• 생물계의 진화는 신의 설계 목적을 담은 존재 사슬 도식이 실재하는 것으로 전개되는 과정이다.

• 점진적 환경 변화는 종 변형의 인과적 원인이다.                  

• 생물계의 진화는 지적 설계자인 신 존재에 대한 증거이다.

 

다윈 이후의 신라마르크주의는 크게 두 분파로 갈린다. 그 한 분파는 지적 설계론 전통에 서있는 자연 신학을 옹호하는 진영이며, 또 다른 분파는 신낭만주의 전통의 연장선에 서있는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를 옹호하는 진영이다.

 

베르그송(H. Bergson) 등에게서 발견되는 창조적 진화 관점에 따르면, 존재 사슬의 각 계층은 종과 같은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각 계층은 의식의 발달 단계를 나타내며, 존재 사슬의 정점인 신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적이지 않는 ‘절대적 의식’ 혹은 ‘완전한 자유’를 상징한다. 이때 신은 의식의 발달 과정이라는 변화의 원리로 파악되며, 진화는 신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창조적 진화 관점에서 창조주와 창조를 동일시한 부르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창조적 진화 관점에 따르는 경우, 점진적 환경 변화는 단지 종 변형을 위한 조건일 뿐이다. 기관의 사용에 의한 복잡성 증가 과정은 환경에 적응하려는 의지(volition) 혹은 생명계를 관통하고 있다고 가정된 생기(vital force) 등에 기인한 것이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논증적으로 처리하면, 다음과 같다.

 

<창조적 진화 관점에 따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

• 생물계의 진화는 의식의 단계적 발달 과정이다.

• 점진적 환경 변화는 종 변형을 위한 조건일 뿐이다. 종 변형의 원인은 유기체에 내재한 적응 의지나 생기와 같은 것이다.                                          

• 따라서 생물계의 진화는 의식의 발달 과정의 원리인 신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라마르크에게 종 변형의 결정적 원인은 특정 기관의 사용 유무이다. 환경은 단지 진화를 위한 선택압으로 존재한다. 즉. 환경 요인들은 진화에 인과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 적합성에 대한 외적 조건들일 뿐이다. 따라서 <자연 신학 전통에 따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은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왜곡한 것이다. 더욱이 라마르크는 신에 의해 마련된 존재 사슬을 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동시대 자연 신학 옹호자들의 비판 대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마르크에게 진화는 복잡성 증가 과정이다. 라마르크는 복잡성 증가의 원인을 오로지 자연에서만 찾으려고 했다. 또 그는 그러한 원인을 자연에서 찾는 과학적 작업은 신의 섭리를 알고자하는 욕구와 무관하다고 여겼다. 이 점은 그의 후기 작업에 잘 드러나 있다. 특정 기관이 커지는 현상, 기관들의 연결 방식이 복잡해지는 것 등은 라마르크에게 생물계 진화의 복잡성 증가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한 복잡성의 증가는 오로지 변화된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활동 결과로 수반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라마르크에게서 신의 섭리를 엿볼 수 있는 곳은 환경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단지 기관의 사용 유무에 의한 종 변형의 진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제된 것일 뿐이다. 그 주장이 자연 신학의 목적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라마르크가 자연 신학 옹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미생물의 자연 발생설을 옹호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미생물의 자연 발생설은 세균의 분리와 인공 배양 기술이 발전하면서 거짓 가설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이 없었던 시절, 미생물의 자연 발생설은 초자연적 원인을 가정하지 않고 자연 현상을 설명하겠다는 ‘자연주의(naturalism)’ 입장을 대변했다. 이러한 까닭에, 라마르크는 동시대 자연 신학 옹호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대한 해석에서 존재 사슬이 신에 의해 마련된 것이라는 전제가 붙을 이유는 없다. 그는 신이 예정한 진화의 경로를 전제하는 ‘목적론적 진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대한 해석에서 존재 사슬 도식은 진화가 복잡성 증가의 과정이라는 그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한 개념적 장치 혹은 도구로 이해되어야 바람직하다. 이때 <자연 신학 전통에 따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의 첫 번째 전제, 즉 생물계의 진화가 신의 목적을 담은 존재 사슬의 전개 과정이라는 것은 라마르크의 진의를 왜곡한 것이다. 점진적 환경 변화를 종 변형의 인과적 원인으로 간주하는 두 번째 전제도 라마르크의 진의를 왜곡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전제에 근거하여 생물계의 진화가 지적 설계자인 신 존재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라마르크 진화론을 왜곡한 것이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해석할 때 잘못된 세 가지 주장이 있다. 그 세 가지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첫째, 생물계의 진화는 신이 예정한 목적에 따른 결과이다.

 

• 둘째, 환경은 변이의 원천으로 종 변형에 대한 인과적 원인이다.

 

• 셋째, 종 변형의 원인은 유기체에 내재한 적응 의지나 생기와 같은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자연 신학 전통에 따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과 관련하여 이미 살펴보았다.

 

위 세 가지 주장에는 생물계의 진화에서 우연적인 기회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유기체가 어떤 환경에 살게 되는지를 결정해주는 필연적 법칙은 없다. 즉, 유기체가 어떤 환경에 살게 되는지는 기회적인 것이다. 만약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러한 기회적인 성격은 약화된다. 만약 세 번째 주장을 받아들이면, 진화는 단순히 환경 변화에 대한 유기체의 생존 적합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은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 관점에 따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의 근간이 되는 세 번째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라마르크가 강조한 기관의 사용을 어떤 의식적인 것 혹은 의도적인 것과 연관시킨 사람들은 주로 신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라마르크가 유기체에 내재한 적응 의지를 가정했다는 잘못된 주장이 퍼지게 된 것에는 찰스 다윈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다윈의 편지를 보면, 라마르크가 그렇게 주장한 것처럼 강조하면서 ‘좀 더 완벽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마르크 자신은 진화를 위해 적응 의지와 같은 것이 가정되어야 한다고 명시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다윈은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창조적 진화 관점에 따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그 해석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과학적 설명의 한계는 반드시 어떤 참다운 형이상학적 토대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독단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철학자나 인문학자들에게서 자주 엿볼 수 있는 그러한 독단은 일종의 ‘문화적 질병’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과학적 설명의 한계를 들먹여 어떤 형이상학적 토대를 내세우는 것은 과학에서는 불필요한 ‘완벽한 세계 이해에 대한 환상’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마르크가 생각한 신 개념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이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