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점들의 간격과 위치 4.1. 라마르크의 자연주의 1

착한왕 이상하 2010. 2. 4. 02:30

(4) 라마르크의 자연주의 1

신을 믿는 사람이 자연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라마르크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마르크의 입장을 받아들일 때 그는 과학과 양립 가능한 창조설을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로 보았다. 라마르크에게 신은 우주를 설계한 존재도, 생명의 씨앗들을 우주에 심어 놓은 존재도 아니다. 그에게 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목적인도, 작용인도 아니다. 그의 신은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전이 및 생물계의 진화에 대한 가능성만 우주에 마련해준 존재이다. 즉,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전이 및 생물계의 진화는 우주의 자기 조직화 과정의 산물인 까닭에 신에 의해 예정된 조화의 전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력과 같은 물질의 필연적 속성의 제한 속에 대상들의 우연적인 연결망이 형성되고, 그 형성 과정에서 질서가 드러난다. 유기체에 의해 자연적인 제어가 불가능한 환경의 제한 속에 기관의 사용 유무가 종 변형 과정의 역사를 산출시킨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성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진화에 대한 그의 설명 방식에 지적 설계의 개념이 끼어들 구석은 없다. 이 때문에, 라마르크는 지적 설계자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적이라 여겼던 당시의 자연 신학 옹호론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진화론에 근거하여 무신론을 옹호하는 진영은 라마르크의 신 개념이 기독교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진화론과 명백히 양립 불가능한 신 개념은 지적 설계자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적 설계자 개념만이 기독교의 참다운 신 개념이라고 주장해야지만, 진화론에 근거한 무신론도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 설계자 개념만이 기독교의 참다운 신 개념이라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현대 과학은 여전히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전이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며,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에 따른 신 개념과 진화론의 양립 불가능성도 증명할 수 없다. 피셔를 비롯해 진화론의 과학화에 기여한 여러 인물들은 유신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다윈은 무신론자였다. 그는 생물계의 진화 현상만 가지고는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전이 과정을 설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 사슬의 논리적 해석과 관련된 다양한 신 개념을 인정한다면, 유신론 대 무신론의 논쟁에서 과학은 그 핵심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두 이념 중 하나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는 과학이 다양한 세계 이해에 대해 열려 있다는 과학의 성격에 반하는 것이다.

  

과학의 자연주의 입장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정에 초자연적인 것을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결성을 만족하는 가설은 특정 측정량에 함축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해준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특정 지역 핀치의 긴 부리가 생존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규명해준다. 과학의 자연주의 입장은 결코 특정 세계 이해를 올바른 것으로 정당화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배제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다. 특정 집단의 세계 이해 방식은 그것의 사회적 기능과 맞물려 평가되어야 하는 까닭에, 단순히 과학적 증거 유무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배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과학적 작업 자체가 다양한 세계 이해 중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검열관의 의무에 종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라마르크가 신을 믿었다고 하여도, 그의 자연주의 입장은 그대로 유지된다. 라마르크는 과학의 한계를 가지고 신 존재를 증명해보려는 시도를 비웃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과학적 잡업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무신론자로서의 라마르크’, ‘불가지론자로서의 라마르크’, 그리고 ‘무종교인으로서의 라마르크’도 가능하다. 이를 ‘복잡성 증가’라는 개념이 라마르크의 발견에 사용된 방식을 통하여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