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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판단'이 법률 용어?

착한왕 이상하 2016. 9. 18. 01:44



다음은 오늘자 벨기에 안락사를 다룬 기사이다.


<벨기에서 불치병 아동 안락사 앞둬..미성년자로는 처음>

http://media.daum.net/foreign/europe/newsview?newsid=20160917234506720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벨기에는 이성적인 판단 할 수 있고 불치병 말기인 환자에 한해 미성년자를 포함한 전 연령에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다."


해당 기사 원문을 찾아 보면, '이성적 판단'에 해당하는 표현은 'rational decision'이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합리적 결정'이지 '이성적 판단'은 아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영어에 '이성적 판단'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표현이 있는가?


없다. 'reasonable judgement'는 합당한 판단에, 'rational judgement'는 합리적 판단에 대응한다. '이성에 호소한 혹은 근거한 판단'과 같은 용어는 영어에 있지만, '이성적 판단'은 없다. '이성에 근거한 판단'과 같은 표현은 영어의 경우 특정 인물 및 주제를 다룬 철학 책 등에 등장할 뿐이다. 그런 표현은 신문기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보통 'rational'이라는 것은 계산 및 추리 능력과 관련된다. 그러한 능력이 감정에 대비되더라도 감정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이성'이라는 것은 그런 능력을 포함한 더 광범위한 것으로 매우 특이한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이성이란 '필연적고 보편적인 것을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첫원리 혹은 전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칸트의 경우, '경험을 넘어서 보편 법칙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스피노자의 경우, '자연에 내재한 신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그러한 이성적 능력은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 능력의 존재는 의심스럽다. 그것은 변화 속에 불변하는 것을 가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여긴 서양 문화의 산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안락사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는 자신이 겪는 정서적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통 합리적 결정이란 '남에게 현혹 당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계산(고려)해 특정 사안을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합리적 결정을 규정하는 데 '이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이 사용될 이유는 없으며, 철학적 이성 개념을 가지고는 안락사 허용을 정당화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구체적 사안들의 유사성 및 차이를 다루고 양형 등을 결정하는 법률학에서 '이성적 판단'이라는 표현은 사용될 여지가 없다. 다만 중세 법 등을 논하는 법철학에서는 당시 법률 제정에 근거가 된 신학적 논쟁 등을 다룰 때 '이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서양 철학이 무차별하게 도입되면서 '이성'이라는 단어가 막 사용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가 유일할 듯 싶다. 심지어 '일반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상황에서도 '보편적'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신문기사, 교과서, 대중서로 인해 '이성적', '보편적' 등에 정신이 미쳐가는 사람들만 늘어날 듯! '이성적'이라는 표현이 과거 동양에서 자주 사용되었습니까? 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