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 86

여기: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

(3)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 ‘실체’는 일상생활에서 ‘헛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철학에서 ‘실체’는 ‘근본적인 존재’ 혹은 ‘궁극적인 존재’를 뜻한다. ‘실체’의 의미는 애매모호하다.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해석 방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에서 실체의 문제는 존재에 대한 경험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해석 방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과라는 대상을 경험할 때 사과의 형태, 색, 맛 등은 서로 분리되어 경험되지 않는다. 또한 한 장면을 본 것과 다른 장면을 본 것 사이에는 추론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계는 본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 성립하기 때문이다. 지각 경험을 단순한 인과적 관계로, 혹은 감각 기관을 통한 수동적 과정으로만 설명하려는 근대적..

여기: 논의의 구성 방식

(2) 논의의 구성 방식 유럽 역사의 맥락에서 접근할 때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세속화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 볼만한 것이 정말 이 땅에 있었다면,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 가능한 것이 있어야 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전적 이원론은 지상계와 천상계, 인간적인 것과 신성적인 것, 평신도와 성직자를 이분 하는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 볼만한 과정이 이 땅에 있었다면, 그 과정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 첫째,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할만한 것을 이 땅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할만한 것이 붕괴되거나 약화되는 역사적 성향이 이 땅에 나타났어야 한다. 이 땅의 역사에 위 두 조건을 만족하는 과..

여기: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성

여기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 볼만한 것이 이 땅에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 그 누구도 강하게 긍정적으로 답하거나, 부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만약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이 땅의 역사에 있었더라면, 동서 비교 철학과 같은 분야의 의미는 퇴색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분야는 서양의 역사적 맥락에 흡수될 수 없는 동양의 역사적 맥락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럽의 세속화 과정과 비교해 볼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 아예 없었다면, 조선(朝鮮) 이후 대세가 된 유교(儒敎)는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흔들림 없이 사회 전체의 통합 원리로 기능했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18세기 중엽 이후의 이 땅의 사회와 학풍을 고려할 때 너무나 강한 것이다.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 ..

저기의 맥락

(2) 저기의 맥락 세속화 과정의 역사적 규정 방식과 철학적 규정 방식의 논리적 관계는 무엇일까? 세속화 과정의 역사적 규정 방식은 실제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 바탕을 두고 계층 분화에 따른 사회 구조 변동을 설명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반면에 세속화 과정의 철학적 규정 방식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된 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전통에서 그 시대를 단절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즉, 그 시대에 ‘규범적 독자성’을 부여함으로써 과거 전통을 암흑기로 규정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때 세속화 과정의 역사적 규정 방식에 함축된 목적은 철학적 규정 방식에 함축된 목적을 전제하지 않지만, 이에 대한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속화 과정의 역사적 규정 방식과 철학적 규정 방식의 논리..

세속화 과정에 대한 두 가지 규정 방식

(1) 세속화 과정에 대한 두 가지 규정 방식 ‘세속화 과정’은 유럽 사회가 ‘교회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난 역사적 과정’을 뜻한다. 세속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이해 방식을 따를 때, 세속화 과정에 대한 규정 방식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 첫째, 세속화 과정은 사회 체계의 각 계층이나 분야가 종교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고유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종교적 교리 해석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고유성을 확보한 각 계층이나 분야는 ‘세속화된 것’으로 여겨지며,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특정 종교가 사회 전체의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뜻한다. • 둘째, 세속화 과정은 종교 혹은 종교성이 사장된 사회 상태를 향해 나가는 역사적 단계를 뜻한다. 이때 세..

저기: 서문

저기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무종교인이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근대 및 현대적인 것으로 불리는 특징들, 즉 근대 및 현대를 특정 시기의 과거 전통과 구별시켜주는 특징들은 종교적인 것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양립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실제 세속화 과정보다는 그 과정에 대한 극단적인 지적 반응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그러한 극단적인 지적 반응에 따르면, 종교성의 사장이 세속화의 본질처럼 규정되며,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은 종교성의 사장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해 특정 시기의 과거는 근대 및 현대에 비추어 암흑기로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 방식을 함축한 지적 반응이 19세기 세속화 운동을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상계..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2. (수정)

(4)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2 세속화 과정은 종교가 사회의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어 간 과정이다. 유럽에 국한하는 경우, 세속화 과정은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사회에 정착한 과정이기도 하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은 이를 부정하는 관점이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을 대표하는 두 입장은 ‘기독교의 세속화’와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이다. 전자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세속화’는 단지 ‘기독교에 뿌리를 둔 개념들의 세속화’를 뜻한다. 이때 세속화 과정은 단지 기독교 전통이 세속화된 과정일 뿐이며,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은 더 이상 현재와 과거를 구분해주는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즉, 세속화 과정에 ‘근대성’과 ‘..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1 (수정)

(3)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1 앞서 살펴본 ‘신학과 자연 철학의 관계에 대한 논쟁사’를 바탕으로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를 알아보자. 그 이유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입장이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근거해 세속화 과정의 독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 •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을 받아들이는 경우,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받아들이거나, 기독교의 가치 체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 도덕 담론에서 종교적 측면을 다룰 수 있지만, 이로부터 도덕의 종교 기원론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기독교의 가치 체계를 부정적으로 ..

신학과 자연 철학 (13~16세기 short version 수정)

(2) 신학과 자연 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때 영지주의(gnosism)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플로티누스(Plotinus)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받아들이면서 영지주의를 부정했다.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는 서로 양립하기 힘든 측면을 갖고 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이 세상은 ‘악(惡)의 신’이 지배하는 곳이다. 육체에 갇힌 영혼의 원천은 ‘선(善)의 신’이 창조한 초월적 세계이다. 반면에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모든 것은 불변적이고 무한한 ‘하나(One)’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절대적 ‘하나’에 대비된 완벽함의 정도를 갖는다. 그 하나를 유일한 창조주로 가정하는 경우, ‘악의 신’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때 ‘악함의 정도’는 ‘본래적인 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신의 속..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 (수정)

기독교와 세속화 종교 시장 논리는 종교 시장이 형성된 사실을 가지고 세속화 과정을 허구로, 혹은 사소한 것으로 규정하는 입장이다. 종교 시장 논리는 와 라는 두 논증에 기대고 있다. 그 두 논증을 부정한다고 해서, 종교 시장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 두 논증의 부정은 ‘전통과의 단절로 세속화를 규정하는 방식’, 즉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세속화의 규정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속화 과정을 ‘주제 생성’, ‘과거 전통의 재구성으로서의 문제 해결 과정’, ‘새로운 세계 이해 및 관점의 생성’, ‘새로운 주제 설정’이라는 역사적 템포들로 중첩된 과정, 즉 ‘재구성의 변형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 와 라는 두 논증을 받아들여도 근대 및 현대가 과거와 구별되는 성격이 무의미해지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