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 86

가상의 정치적 실험 3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현실에 수긍할 수 없는 판단 기준은 제 각기 다를 수 있다. 어쨌든 각자 원하는 세상의 그림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의 그림은 현실을 구체적 문제들로 규정하고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는 고민에서 나올 때만 구체적 이론으로 체계화될 수 있다. 그러한 세상의 그림들 대다수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현실에 대비된 과거 혹은 미래, 아니면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사회를 이상 세계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 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이상 세계에서 특정 시대의 민중이 두려워했던 것, 그리고 원했던 세상의 그림을 엿볼 수 ..

가상의 정치적 실험 2

먼저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이상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자. 무선적으로 선출된 시민들로 구성된 어느 지역의 시의회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의회를 구성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와 함께 반국가주의(anarchism)는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는 정치 체제를 대표한다. 반국가주의는 향촌 기반의 조합 공동체제를 논할 때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주로 투표 제도에 기반을 둔 간접 민주제 형태를 띤다. 간접 민주제나 직접 민주제 모두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를 지향하지만, 전자의 실천 방법은 ‘정치가 계층에 의한 정치’, 후자의 실천 방법은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간접 민주제의 ..

가상의 정치적 실험 1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었다고 가정하는 경우, 그 과정은 이제 다음과 같은 성향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 첫째, 그 과정은 동양적 자유 개념으로 규정된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이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게 되는 과정이다. • 둘째, 그 과정은 실질적 기득권층을 형식적 기득권층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불가능해 지는 과정이다. • 셋째, 그 과정은 을 반드시 만족할 필요가 없으면서 능 절대 허용하지 않는 현실 공간이 이상적인 사회 상태로 간주되게 되는 과정이다. 첫 번째 성향에는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 배어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 관점에 따른 개인은 사회 구조 자체를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잠재적으..

가상과 실재 6. 영역과 계층의 관계를 통해 본 세속화 과정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기 이전의 상황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 교육, 정치, 경제 등 사회 영역들 각각에 대응하는 별도의 계층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사회 영역들은 고정된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는다. 위 두 조건을 만족하는 현실 공간 S를 분석해 보자. • A, B, C, D 각 영역에 대응하는 특별한 계층 a, b, c, d가 있다. a에 속하는 사람이 A이외의 영역 B와 C에 안주하는 것은 S에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b, c와 d 계층에 속한 사람도 B, C와 D 이외의 영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다. A가 사회 영역들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면, A에 대응하는 계층 a의 사람들은 b, c와 d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는다. 물론 각 영역의..

가상과 실재 5. 사항유비를 통해 본 유교의 변통 가능성

중심과 주변의 맥락의 핵심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탈색시키면, 그 관점은 더 이상 우열 구분의 관점과 결합할 수 없게 된다. 이때 그 두 관점을 결합시켜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옹호하는 방식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규정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면, 신분제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된다. 신분제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되면, 신분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체제를 찾는 것’이 시대적 과업으로 떠오른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우리만의 순수한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어느 지역이든, 그 지역의 문화는 다른 지역의 문화와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게 때문이다. 하지만 각 지역의 역사적 변..

가상과 실재 4. 새로운 정치론의 이론적 배경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시점에서 이 땅의 지적인 어느 누구가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을 둘러싼 논쟁을 본다면, 그는 두 입장 중 무엇에 호감을 가질까? 두 입장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에서 분리된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선택의 자유가 과연 공동체의 조화를 보장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자유가 근거하는 개인 개념은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형성되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단순히 실제 개인을 이상화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따라서 그가 호감을 가지고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 낙관적 입장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 간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복지가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이기 때..

가상과 실재 3. 새로운 사회 구조와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인식

신분제를 용납할 수 없는 인물들을 더 이상 급진적이라거나 반사회적 인물들로 분류하기 힘들게 된 가상의 시점에서 논의를 이어가 보자. 그 시점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사회적으로 실현된 시기로 여겨져야 한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동양적 자유 개념도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때 개인은 여전히 과거 전통이나 인간관계에 의존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의 핵심은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이며,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의 출발점은 인간 중심 사상이 형성되면서 시작되었다. 반면에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했으며, 그러한 인식은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는 동양..

가상과 실재 2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의 약화와 함께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자연의 고정된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고, 자연의 고정된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할 수 없게 되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은 강한 의미에서 해석된다. 또한 두 관점을 결합시킨 것을 사회에 투영하여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것도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가상의 역사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때 그러한 인식은 다음을 뜻한다. • 개인의 판단은 개인들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 그물망에 의존적이다. 이 때문에, 기존의 가치 체계나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과 실재 1

신유학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의 입장에 따르면, 그 구분 맥락의 핵심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반드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때 인간 존재를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전제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결합시킨 것을 사회에 투영하여 엄격한 신분 ..

가상의 역사 14.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근거한 이 땅의 세속화 과정 1 (윤곽)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신유학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갖는 내용적 비정합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 인식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세 가지 관점들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함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적 분리 가능성은 약한 의미와 강한 의미로 나뉜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에 따르면, 그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하지 않는 경우,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우열 구분의 관점’이 반드시 내용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없다. 이때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