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 86

가상의 역사 3. 연암, 양반, 예법

박지원의 호인 ‘연암’은 황해도 금천군에 위치한 골짜기를 일컫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연암은 42세 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연천군에 숨었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하급 관리직에 등용된 연암의 이력을 감안한다면, 연암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황해도 골짜기에 숨은 사실은 ‘설명을 요구하는 사실’에 해당한다. 연암이 목숨의 위협을 받게 만든 결정적 원인 중 하나는 그의 글 때문이었다. 양반 신분에 속하면서도 양반의 권세를 누릴 수 없었던, 아니 누리길 거부했던 연암은 그의 글로 인해 당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무리, 즉 벽파(辟派)에 속하는 인물로 몰렸다. 연암이 43세 때 사촌 형을 따라 중국에 사신을 갔던 시기 이전의 글들은 전기 작품으로, 그리고 이후의 글들은 후기 작품으로 분류된다. 따라..

가상의 역사 2. 초기 조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과 고전적 이원론은 한때 특정 지역을 지배했던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한 공통점은 내용적 측면이 아니라 기능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체 개념을 통해 분석해 보았듯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내용적 측면에서 고전적 이원론과는 차이를 보이는 세계 이해 방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전적 이원론은 내용적 측면에서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반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그렇지 않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전적 이원론은 기독교의 틀 내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압력을 받았던 반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유교의 틀 내에서 변통(變通)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

가상의 역사 1. 도입부

(3) 가상의 역사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볼 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긍정해야 한다. 신유학에 함축된 세계 이해 방식인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기능의 측면에서 고전적 이원론에 대응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이 땅의 역사에서 붕괴되거나 약화되는 성향은 어느 정도 강하게 나타났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고 가정하고,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다음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 유교에 반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의 의견이 반사회적이라거나 사회에 무관심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 분위기가 가상의 역사 속에 형성되어야 한다. 세속화가 반종교적인 ..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잠재된 유교의 변통 가능성

(2)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잠재된 유교의 변통 가능성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으로 구성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 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고 할 때, 이것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모순을 발생시키는 ‘자기 파괴적인 이론 체계’임을 뜻하지 않는다. 만약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자기 파괴적일 정도로 정합적이지 않다면, 그 구분 맥락을 함축한 유교를 정교한 이론 체계라고 할 수 없다. 이때 유교의 형성 과정에 기여한 사람들과 유교에 따라 생활한 사람들은 비논리적이거나 무비판적인 사람으로 평가되고 만다. ‘논리’라는 것을 논증의 형태나 추론 형식에 국한시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의미에서 접근할 때, 그것은 그..

여기의 실 꼬임: 고전적 이원론의 정합성

(1) 고전적 이원론의 정합성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이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대한 필연적 원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서양의 역사에 비추어 그 과정을 평가한다면, 그 과정은 세속화 과정의 핵심이다. 고전적 이원론은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이분법’,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분법’이라는 세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전적 이원론을 구성하는 세 관점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와 달리, 유교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세 관점, 즉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은 논리적으로 정합적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없다. 이를 먼저 논하지 않는다면,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가상의 역사를 통해 본 여기의 실 꼬임: 도입부

가상의 역사를 통해 본 ‘여기’의 실 꼬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의 역사에 있었다면, 그것은 최소한 다음 두 물음에 대해 긍정해야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볼 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 있었는가? •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볼 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서 붕괴되거나 약화되는 역사적 성향은 강하게 나타났었는가?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볼 만한 것은 이 땅의 역사에 있었다. 그것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으로 구성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전적 이원론과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내용적 측면에서 다르다. 하지만 그 둘은 기능적 측면에서 한때 특정 지역의 세계 이해 방식을 지배했다는 ..

프랑스 혁명을 통해 본 '저기'의 실 꼬임

프랑스 혁명을 통해 본 ‘저기’의 실 꼬임 역사를 여러 가닥의 실들이 서로 얽혀 꼬이는 현상에 비유해 보자. 이때 각 가닥의 실은 특정 이념이나 종교 교리에 비유된다. 실들이 쉽게 꼬이기 위해서는 ‘축’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축은 서로 다른 실들이 꼬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진행 중인 문제의 상황’과 같은 것에 비유된다. 한 세대나 여러 세대에 걸쳐 논의 가능한 문제들로 구성된 ‘담론의 장’만이 서로 다르면서도 비교 가능한 여러 이념들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의 역사’를 ‘저기’로, 그리고 ‘서양 역사에 대비된 우리의 역사’를 여기로 상징하자. 역사를 실 꼬임 현상에 비유하는 경우, ‘저기’의 실 꼬임과 ‘여기’의 실 꼬임이 다르다는 것은 ‘저기’..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

(6)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고전적 이원론의 관점에 따르면, 지상은 공간적으로 천상에 대비된 곳이 아니다. 천상계는 신성(神聖)이 구현된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천상계에 대비된 지상계는 신의 속성이 충분히 구현되지 않은 곳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천사와 달리 천상계에 살 자격을 갖지 못한다. 인간은 지상의 괴물들과 함께 천상을 우러러 보며 신을 찬양해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고전적 이원론의 관점에 따른 ‘지상계’는 ‘선을 결여한 영역’을, 그리고 ‘인간’은 ‘선을 결여한 존재’로 규정된다.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 따르면, 천(天)과 지(地)는 양(陽)과 음(陰)을 상징하며, 천지조화(天地調和)는 기(氣)의 활동성이 이(理)에 ..

기독교의 신(神) 개념과 신유학의 이(異) 개념

(5) 기독교의 신(神) 개념과 신유학의 이(理) 개념 유교 전통의 궁극적 실체 개념인 이(理)가 기독교의 신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양(陽)과 음(陰)의 관계를 영지주의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 함축된 선과 악의 두 실체 사이에 성립하는 수평적 대립 관계와 비교해 보자.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의 수평적 대립 관계를 가정하는 경우, 그 둘 중 무엇이 우선하는지는 논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과 음 중 무엇이 우선하는지는 논할 수 없다. 양은 빛, 열, 불 등 활동적 기운이나 사회의 상부를 차지하는 계급을 상징한다. 그것은 또한 사건 전개 과정의 결과나 감정의 동요 등을 상징한다. 반면에 음은 어두움, 차가움 등 수동적 기운이나 안정된 상태 혹은 사회의 하부를 차지하는 계급을 ..

선과 악

(4) 선과 악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를 가정하는 경우, 실체가 반드시 하나 혹은 한 종류일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사원소설(四元素設)을 생각해 보자. 사원소 없이는 그 어떤 대상도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가정된다는 점에서, 사원소는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는 사원소라는 실체에 의해 설명된다. 또한 사원소는 일반적으로 변화 속에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된다는 점에서, 사원소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상반된 성질을 갖는 사원소들 중 무엇이 논리적으로 선행하는지 혹은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지를 따질 수 없기 때문에, 사원소설은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를 하나 혹은 한 종류로 보지 않는 세계 이해의 방식으로 분류된다.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