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과학, 기술, 사회 75

섹솔로지의 개척자들: 마구누스 히르쉬펠트 2-1. 제 3의 성

2. 사회 운동가로서 히르쉬펠트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성과학은 그의 성소수자 해방 운동보다 훨씬 급진적 성격을 갖고 있다. 히르쉬펠트는 기존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완전히 해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남성 혹은 완벽한 여성이란 없다. 누구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중간적 성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성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젠더 개념도 생물학적 요인들에 저항하거나 혹은 생물학적 요인들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당양한 성 정체성은 이미 생물학적 사실이라는 것이 히르쉬펠트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누구나 그 자신만의 성 정체성을 갖고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섹솔로지의 개척자들: 마구누스 히르쉬펠트 1. 섹스의 아인슈타인

마그누스 히르쉬펠트 젠더, 퀴어, LGBTI(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nd intersex) 등의 개념이 대중화된지 꽤 되었다. 이제 제 2차 대전 이후 인간의 성 연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알프레드 킨제이(A. Kinsey)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대적 성의학(sexual medicine), 섹솔로지(sexolgy)의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 Herschfeld)를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적 취향, 정체성과 관련해 히르쉬펠트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이분법을 해체하려 했다면, 킨제이는 아메리카 인들의 일반적인 성적 활동을 분석하고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내어 유명세를 탔다. 성에..

대구 지하철 참사의 교훈

대구 지하철 참사의 교훈 왕은 행복했다. 나라가 강성해지고 백성이 사방에서 몰려드니, 이보다 기쁜 일은 왕에게 없었다. 그런데 왕에게도 골칫거리가 생겼다. 수도가 마차들로 붐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고민에 빠진 왕은 서국(西國)에서 천리안(千里眼)을 불렀다. 재물과 벼슬을 하사받은 천리안은 수도 중앙에 커다란 탑을 쌓아줄 것을 왕에게 부탁했다. 탑을 중심으로 원형의 도로들이 닦였고, 마차들은 오로지 그 도로로만 달려야 했다. 탑 꼭대기의 천리안의 지시에 따라 각양각색의 깃발이 올라가면, 마차들은 이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천리안이 마차 도로를 관리한 후부터 사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천리안에게 자리를 뺏긴 전직 관리가 백주대낮에 술에 취해 마차에 불을 질렀다. 천리안은 재빨리 지시를 내려 ..

학제 간 연구를 위한 여유 공간의 제도화(업데이트 필요한 것)

* 다음은 에서 부록으로 사용한 것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다음 글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책 145-149쪽을 보는 것이 좋다. 이 글은 2007년에 작성된 것이지만, 글 내용은 여전히 지금의 과학 기술 정책에 적용 가능하다. 물론 복잡한 지식의 범주 구분은 좀 더 세련되게 체계화되어야 한다. 그러한 체계화 작업은 하지 않는다. 다만 이론과 응용이라는 황당한 이분법에 사로잡혀, 가능성은 이론, 실용성은 응용이라고 떠들어 대는 자들이 여전히 과학 기술 정책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그렇게 떠들어 대는 자들은 기술 기반의 현대적 학제 간 연구의 성격도 파악하고 있지 못할 뿐더러, 그저 소수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특정 인물을 무슨 자리에 앉히면 능사라 생각하고 있다. 다음..

직관: 알파고를 둘러싼 잡음들

최근 구글의 인공 지능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 대국을 놓고 이런 말들이 흘러나온다. “인공 지능 AI의 발달로 인해 결국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AI보다는 AI 기술을 가진 집단이 더 위험하다.” “AI가 인간의 삶 속 곳곳에 침투하게 되는 미래는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새로운 획기적인 것,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이 나올 때마다, 미래를 유토피아 대 디스토피아 혹은 구원 대 종말로 묘사하는 담론이 판친다. 소위 ‘석학’이라 불리는 자들의 상당수는 그러한 담론을 학적(學的)으로 포장한다.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알파고는 과연 인간의 직관을 어느 정도 구현하고 있을까? 알파고에 사용된 AI 기술 및 연구는 정부가 AI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야 할 만큼 획기적인 것인가? 이러한 물..

외계인 납치(Alien Abduction) 가설

외계인 납치 가설 * 문화 산업의 부작용 또는 인간사의 희극 발명은 대부분 기업을 통해 사회에 확산된다. 그 과정에서 발명가가 큰 이득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만 좋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발명의 확산이 기업과 사회 양쪽에 득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정 발명을 주도한 기업은 망하고 다른 기업을 통해 그 발명이 사회 전체에 득을 준 경우도 있다. 또 발명의 확산이 기업에게만 득을 주고 사회적 잡음만 발생시키고 끝나기도 한다. 고대인의 발명인 최면술이 현대 문화 산업과 결합함으로써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 사건이 있다.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믿는 부부가 최면술의 도움을 받아 당시 기억을 되찾았다는 일화가 알려지자, 그와 유사한 일을 당했다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

일본의 과학 기술과 민족주의

* 다음 글은 오래 생각하고 쓴 글이 아니다. 일본의 '과학 기술과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즉석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군데군데 엉성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노벨상 과학상 수상 때마다 늘상 나오는 잡음 중 하나가 '기초 과학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문 방송에 나오는 기초 과학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주로 대학에서 나오니, 노벨상 수상자를 자주 배출하는 나라의 대학을 조사하면 마치 노벨상 수상 비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지속적인 노벨상 수상자 배출>'이라는 공식이 이 나라에 떠돌고 있는 듯하다. 아예 지역 대학별로 전공에 따른 노벨상 수상자들 전수조사까지 벌인 모양이다. 그..

연구주제: 과학과 정치적 이념들

과학과 정치적 이념들 세속화된 사회 상태란 특정 종교가 더 이상 사회의 지배적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뜻한다. 그러한 상태가 ‘문제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계층 간 이동이 원활해지고 사회 구조가 더욱 분화될수록, 사회를 구성하는 교육, 과학, 기술, 경제 등 영역들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유기적 통합을 모색하는 정치가 요청된다. 이러한 요청을 실현하는 방법론을 마련하는 것은 시대적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의 여러 분과들이 사회 속에서 기능 방식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과학이라는 사회 영역의 고유성은 ‘여러 해석을 허용하면서도 특정 조건 아래 반복 사용 가능한 지식 체계를 산출하는 것’에 있다. 이는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는 과학적 생활양식의 성격을 고려할 때 ..